시읽는기쁨

외로울 때 / 신경림

샌. 2024. 6. 23. 10:35

외로울 때는

협궤열차를 생각한다

해안선을 따라 삐걱이는 안개 속

차창을 때리는 찬 눈발을

눈발에 묻어오는 갯비린내를

 

답답할 때는

늙은 역장을 생각한다

발차신호의 기를 흔드는

깊은 주름살

얼굴에 고인 고단한 삶을

 

산다른 일이 때로 고되고

떳떳하게 산다는 일이

더욱 힘겨울 때

 

괴로울 때는

여인네들을 생각한다

아직도 살아서 뛰는

광주리 속의 물고기 같은

장바닥 여인네들의 새벽 싸움질을

 

밀려가는 썰물도 잡고 안 놓을

그 억센 여인네들의 손아귀를

외로울 때는

 

- 외로울 때 / 신경림

 

 

외로움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비슷한 조건인데도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 있고, 덤덤한 사람도 있다.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고립되면 대체로 외로움을 느낀다. 사회 안에서 내가 하는 역할이 없어지거나 축소되어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은 관계의 결핍에서 온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늙어서 누가 외로움에 시달릴지는 뻔하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내가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다. 언젠가 모임에서 인간관계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독하지만 외롭지는 않아요." 나를 나타내는 적확한 표현이었다. 사람들은 의아해하는 듯 보였지만 물리적 고립은 나를 충만하게 한다. 누구의 간섭도 없는 나만의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혼자'라는 것이 외로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류는 긴 수렵채취 기간을 지내며 외로움을 기피하려는 성향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지 모른다. 공동생활에서 홀로 고립된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인간은 외로움을 못 견뎌하며 고립될 때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닐까. 은퇴한 남자들이 느끼는 심정이 이런 외로움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백세 시대에는 그 뒤로도 긴 외로움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그래서 부지런히 모임에 나가고 친구를 만나고 취미나 봉사 활동을 하면서 자신을 가만 두지 않는다. 일시적인 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관계의 양에 비례하여 상실의 아픔과 외로움의 강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해답은 뻔하다. 외로움을 즐기는 것이다!  외로움을 잊으려 하기보다 다가가 맞이하는 것이다!

 

밖으로가 아니라 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혼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라는 사인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한 축복이 없다. 가족을 부양하고 온갖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감도 사라졌다. 껍데기가 아닌 진실된 '나'를 위해 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외로움이 괴로움이 될 리는 없다.

 

신경림 시인의 시를 읽으며 일반적인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여기서 시인의 외로움은 시대와의 불화라든가 떳떳하게 살아가는 데 따르는 고독에서 연유함을 짐작한다. 한 차원 더 높은 외로움이다. 그렇지 않으면서 못내 시시한 외로움에 시달린다는 것은 너무 초라한 행색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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