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 고은

샌. 2024. 6. 1. 11:42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는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겨울과 함께

깨물어먹고 싶도록 어여쁜 사람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 고은

 

 

6년 전 성추행 논란 이후 시인의 시를 읽지 않았다. 작년이던가, 시인이 침묵을 깨고 새 시집을 냈다고 했을 때도 관심이 없었다. 본인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 해도, 과거에는 관행이었으며 그러려니 했다고 해도, 뒤에 취한 시인의 태도는 너무 뻔뻔했다. 성추행을 폭로한 사람들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고(2심까지 간 결과는 패소였다) 지금도 본인은 떳떳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독자들이 외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시적 재질과 품성 사이의 괴리를 시인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없는 것 같다.

 

며칠 전에 찾아갔던 서후리의 자작나무숲에서 고은의 이 시를 떠올렸다. 시인이 겨울 자작나무숲을 보며 느꼈을 반성과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순수한 마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올라가는 시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했다. 시인의 이름을 가리고 이 시를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가는 자신의 행동과 도덕성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단 고은 시인만이겠는가. 오죽하면 '작품을 위해서는 작가가 요절해야 한다' 말이 나오겠는가. 구순을 넘긴 한 시인의 추락이 너무나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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