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샌. 2024. 7. 9. 11:50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그리움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부터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1548년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을 때 뜻하지 않게 기생 두향(杜香)과 사랑에 빠진다. 아내를 여의고 2년이 지난 때였는데 퇴계 나이는 48세, 두향은 18세였다. 두향은 퇴계와 대화가 통할 정도로 총명했고 퇴계처럼 매화를 좋아했다. 나이만 차이가 컸을 뿐 둘은 공통점이 많았다. 짧은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전날 밤 퇴계는 두향의 치마에 시 한 수를 적어준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다(死別己呑聲 生別相測測)." 퇴계는 두향이 건네준 분매 한 그루를 가지고 떠나는데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애지중지하며 보살폈다고 한다. 그 뒤 둘은 퇴계가 7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두향은 퇴계를 그리워하며 살다가 퇴계가 죽자 강물에 몸을 던졌다. 평생을 한 사람만을 사모하다가 살았던 두향의 묘는 남한강가 옥순봉 근처에 있다.

 

이 애절한 사랑의 시는 고정희 시인이 두향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라는 첫 구절부터 숨을 막히게 한다. 이성간의 사랑은 육체의 접촉을 무시하고 완성될 수 없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는 애틋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그 얼마일 것인가. 시인은 이 시를 쓰고 얼마 되지 않아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사했다.

 

퇴계와 두향의 사랑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견해가 많다. 둘의 사랑을 증명할 만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정비석의 소설을 통해 만들어진 사랑의 서사인지 모른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퇴계의 제자들이 두향 묘를 돌봐왔다는 사실이 희미하게나마 둘의 인연을 추측케는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엄숙한 유학자면서 이토록 다정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 퇴계가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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