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모욕스러운 비방으로 선왕의 명성을 떨어뜨릴까 봐 가장 두렵습니다. 이미 연나라를 버리고 조나라로 가는 큰 죄를 지었는데, 또 연나라가 지친 틈을 타 조나라를 위하여 연나라를 쳐서 연나라에게 앞서 저지른 죄를 요행으로 면해보려는 것은 도의상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신은 영리하지는 못하지만 자주 군자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다만 왕을 모시는 신하들이 주위 사람들의 말을 가까이하여 멀리 내쳐진 신의 행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할까 염려되어 감히 글을 올려 말씀드립니다. 부디 군왕께서 신의 뜻을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사기(史記) 20, 악의열전(樂毅列傳)
악의(樂毅)는 위나라 사람이지만 연나라 소왕을 도와 제나라를 정벌하여 70여 성을 함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악의는 제나라 수도 임치를 뺏고 수많은 보물을 연나라로 보냈다. 이제 제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하필 이때 악의를 신뢰하던 소왕이 죽고 아들인 혜왕이 즉위했다. 악의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혜왕은 제나라 첩자의 말을 듣고는 악의를 문책하기 위해 본국으로 소환했다. 그러자 악의는 조나라로 달아나 투항했다.
악의가 없어지자 제나라는 연나라 군사를 격파해서 수도를 탈환하고 빼앗긴 땅을 모두 되찾았다. 혜왕이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혜왕은 악의가 앙심을 품고 지친 연나라를 공격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악의에게 다시 연나라로 오라고 부르는 편지를 보냈다. 위에 나오는 글은 악의가 혜왕에게 보내는 답신인 '보연왕서(報燕王書)' 중 한 부분이다. 사마천은 편지 전문을 <사기>에 옮겨 놓았다.
이 편지에서 악의는 소왕과 나누었던 군주와 신하 사이의 의를 서술하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모함을 받아 연나라에서 도망쳤지만 선왕과의 의가 우선이라 결코 연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기에는 공명심과 복수심에 불타는 인물이 많이 나온다. 앞에 나왔던 범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악의는 달랐다. 자신의 결백을 밝히려하기보다 선왕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한다. 비록 악의가 이 나라 저 나라로 전전하며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배운 군자의 덕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미더운 측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