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골에 살 때 집 주변에 원추리를 심었다. 노란색의 각시원추리였다. 이웃에서 구근을 줬는데 밤골 생활 초기만 해도 마을 사람들과 사이가 괜찮았다. 원추리 꽃은 좋았는데 줄기에 진드기가 까맣게 붙어 징그러웠다. 원추리를 보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원추리가 한자로는 훤초(萱草)다. '훤' 발음이 '원'으로, '초'가 '추'로 변한 뒤 접미사 '리'가 붙어 원추리가 되었다는 추론이 그럴듯하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원추리'라고 발음하면 어쩐지 이국적인 느낌이 난다.
원추리의 다른 이름이 망우초(忘憂草)다. 비슷한 글자인 '훤(諠)'이 '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리라. 옛날에는 원추리를 집안 깊숙한 내당 뜰에 심었다고 한다. 아녀자들이 이 꽃을 보며 근심과 걱정을 잊었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 시절에는 근심을 잊으라는 의미로 원추리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에도 원추리 그림이 있다.
집으로 오가는 길에 작은 풀밭이 있는데 원추리 몇 송이가 피어 있다. 정확한 이름은 왕원추리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꽃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제발 정신 차리렴. 쓸데없는 걱정이나 조바심은 버리라니까. 뭣이 중헌디?"
'꽃들의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로변 자귀나무 (0) | 2024.07.27 |
---|---|
2024 세미원 연꽃 (0) | 2024.07.23 |
꽃아까시 (0) | 2024.05.28 |
씀바귀 & 고들빼기 (0) | 2024.05.20 |
탄천 붉은토끼풀 (0) | 2024.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