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25

민들레가 민들레씨에게 / 임보

아들아바람이 오거든 날아라아직 여린 날개이기는 하지만주저하지 말고 활짝 펴서 힘차게 날아라이 어미가 뿌리내린 거치른 땅을미련 없이 버리고 멀리 멀리 날아가거라그러나 남풍에는 현혹되지 말라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고 따스하지만너를 차가운 북쪽 산비탈로 몰아갈 것이다북풍이 오거든 때를 잃지 말고몸을 던져 바람의 고삐를 붙잡으라비록 그 바람은 차고 거칠지라도너를 먼 남쪽의 따뜻한 들판에 날라다 줄 것이다아들아살을 에이는 그 북풍이 오거든 말이다어서 나를 떠나거라네 날개가 시들어 무디어지기 전에될수록 높이 솟구쳐 멀리 날아라가노라면 너의 발 아래 강도 흐르고 호수도 고여 있을 것이다그 강과 호수에 구름이 흐르고 숲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그 환상의 유혹에 고개를 돌리지 말고 멀리 ..

시읽는기쁨 2024.08.31

사진 한 점 생각 한 줌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80이 되기 전에 책을 한 권 내보고 싶은 꿈이다. 그동안 찍어둔 사진에 글을 덧붙인 형식으로 하고 싶다. 요사이 유행하는 포토포엠(디카시)으로 할지, 아니면 사진 에세이로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자료함에 수천 장의 사진이 있으니 책을 낼 바탕은 충분하다. 중요한 건 사진과 관련된 스토리일 것이다. 막상 출판을 생각하니 능력 부족을 느낀다. 내용이 부실할 것 같으면 아예 접는 게 좋다. 은 그런 목적하에서 찾아본 책이다. 다양한 경력을 가진 김동준 작가가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중심으로 사진에 얽힌 이야기 및 단상을 적었다. 각 사진과 글을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사군자로 구분하여 정리한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계기로 삼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이런 책을 보면 역시 사람의..

읽고본느낌 2024.08.30

습지생태공원의 늦은 연꽃

시내에 나간 길에 잠깐 습지생태공원에 들렀다. 올 여름 들어 습지생태공원에 들른 것은 처음이었다. 이곳 연꽃이 늦게 핀다는 소문대로 넓은 연밭에는 연꽃이 만개해 있었다. 한창때가 지나기는 했으나 8월 하순에 이 정도의 연꽃을 볼 수 있다니, 감사했다.    공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길에 떨어진 낙엽만 봐서는 벌써 가을이 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쨌든 맹위를 떨치던 무더위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너는 오늘도 참 예쁘다!"가만히 따라서 속삭여본다. 입술에는 살포시 미소가 감돈다.

꽃들의향기 2024.08.28

어른의 일기

'어른이지만, 어른이기에, 어른이어서, 어른이라서' 일기를 써야 한다고 간절하게 호소하는 책이다. 지은이인 김애리 작가는 스스로를 '일기 장인'이라고 소개한다. 열여덟 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20년째 일기를 쓰고 있다. 책 서두에는 이런 말이 실려 있다."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차근차근 기록해나가는 일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요." 내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일기의 한 형식이라면 내 일기도 20년이 넘었다. 그 전에 노트에 썼던 일기는 많이 사라졌고 일부만 남아 있다. 내 일기의 역사도 만만치 않은 셈이다. 그러므로 일기를 예찬하는 지은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일기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자신의 감정에 정..

읽고본느낌 2024.08.27

사기[23-1]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근심을 덜어주고 재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다툼을 풀어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령 보상을 받으려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이니 저 노중련은 차마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여 사느니 차라리 가난할 망정 세상을 가볍게 보고 내 뜻대로 하겠노라!" - 사기(史記) 23-1,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노중련(魯仲連)은 제나라 사람으로 권력과 부보다는 명예를 귀하게 여기는 선비였다. 벼슬을 탐하지도 않았다. 노중련이 조나라에 있을 때 조나라는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포위되는 위기에 놓였다. 직전에 조나라 군사 40여 만 명이 생매장 당한 장평전투가 있었다. 이때 이웃 나라를 설득해 연합전선을 펴서 진..

삶의나침반 2024.08.26

8월 / 김사인

긴 머리 가시내를 하나 뒤에 싣고 말이지야마하 150부다당 들이밟으며 쌍,탑동 바닷가나 한 바탕 내달렸으면 싶은 거지 용두암 포구쯤 잠깐 내려 저 퍼런 바다밑도 끝도 없이 철렁거리는 저 백치 같은 바다한테침이나 한번 카악 긁어 뱉어주고 말이지 다시 가시내를 싣고새로 난 해안도로 쪽으로부다당 부다다다당내리 꽂고 싶은 거지깡소주 나팔 불듯총알 같은 볕을 뚫고 말이지 쌍, - 8월 / 김사인  김사인 시인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다른 시여서 깜짝 놀랐다. 늘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하고 얌전해 보이는 시인의 내면에 이런 불 같은 열정과 일탈이 숨어 있다니, 의외였지만 솔직히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나도 가끔씩 뭔가가 불끈 치솟아 오를 때가 있다. 주체할 수 없는 궤도 이탈의 욕구 같은 것이다. '야마하 150'은 ..

시읽는기쁨 2024.08.25

여수천의 아침

야탑 모임에 나갈 때는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나간다. 그리고 예닐곱 버스 정거장 전에 내려 여수천을 따라 걸어서 약속 장소로 간다. 한적한 오전에 한가한 마음으로 걷는 행복한 시간이다. 여수천(麗水川)은 탄천의 지류다. 성남시 갈현동에서 시작하여 도촌동과 여수동을 지나 탄천과 합류한다. 길이가 4km 정도 되는 작은 하천이다. 관리를 잘해서 주변 환경이 깔끔하고 수질도 깨끗하다. 민물고기가 보이고 수량이 불어나면 탄천에서 커다란 잉어도 올라온다. 너구리를 주의하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다. 그만큼 야생동물의 서식 환경이 좋아졌다는 뜻이리라. 도시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하천의 존재가 무척 고맙다. 요즘 같은 여름에는 산책로가 한산하다. 사람이 들어간 사진을 찍자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 느릿느릿 걸어도 몸..

사진속일상 2024.08.24

올해의 미숙

정원 작가가 만화로 그려낸 한 소녀의 성장기다. 이름은 정미숙, 친구들이 "미숙아"라고 놀리며 불러도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는 마음 여린 아이다. 그럴 만하다. 명색이 시인인 아버지는 무능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어머니가 식당 일로 생계를 꾸리지만 늘 쪼들리는 살림이다. 언니와도 소통이 안 되는 외로운 미숙이다. 가난과 가정폭력은 연약한 여자 아이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하다. 다행히 중학생 때 단짝인 된 재이라는 친구가 있어 미숙의 정신세계를 열어준다. 재이는 미숙과 달리 활달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다. 집과 학교에 갇혔던 미숙은 재이를 따라 작은 일탈을 경험하며 성장해 나간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미숙은 다시 홀로 서야 한다. 아버지와 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학교를 그만둔 미숙은 검정고시를 ..

읽고본느낌 2024.08.23

속물들의 세상

세상이 변하면서 사람들이 쓰는 말도 달라진다. 새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옛날에는 자주 썼는데 지금은 빈도가 확 떨어진 말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속물'이다. 전에는 "속물 같은 놈"이라고 흔히 말했는데 요즘은 좀체 듣기 어렵다. 과연 속물이 줄어들어서 그런 걸까? 속물(俗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교양이 없으며 식견이 좁고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에만 마음이 급급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다. 속물근성(俗物根性)이라는 말도 있는데 '금전이나 명예를 제일로 치고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는 생각이나 성질'이다. 속인(俗人)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지만 인(人) 대신 물(物)이 붙으면 한마디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속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모욕을 느낄 만하다...

참살이의꿈 2024.08.21

내 어머니 이야기

김은성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의 일생을 그린 4권으로 된 만화책이다. 전부터 이 책의 유명세를 알고 있었으나 만화라는 이유로 차일피일 읽기를 미루었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이면 가벼운 만화가 어떨까 싶어 도서관 서가에서 꺼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마치 판화와 같은 흑백의 그림이 주는 효과가 더해져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작가의 어머니는 함경도 북평에서 나고 자라 결혼하며 살다가 6.25 때 남한으로 내려왔다. 북과 남에서 일제 강점시대와 전쟁, 분단과 근대화 과정을 전부 체험한 것이다. 한 개인의 일생에 우리나라의 역사가 투영되어 있다. 험난한 세월을 견뎌낸 한 여인의 사연이 안쓰러우면서 따뜻하다. 특히 함경도에서 보낸 어머니의 소녀 시절 이야기는 옛 농촌 공동체의 따스한 모습을 보여준다. 내 고향 마을..

읽고본느낌 2024.08.20

20층 계단 오르기

올여름은 유난히 덥다. 수도권에서는 한 달째 열대야(熱帶夜)가 이어지고 있다. 기상 관측 이래 신기록이라고 한다. 8월 하순에 접어들었건만 폭염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2024년은 가장 뜨거운 여름으로 기록될 듯하다. 내가 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바깥 걸음은 가능한 한 피한다. 가만히 있으면 소란한 마음이 잦아들고 더위도 멀어진다. 한낮에는 선풍기나 에어컨의 도움을 받으며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것이 나의 피서법이다. 굳이 바다나 계곡으로 찾아갈 이유가 없다. 책 속에 바다가 있고 산이 있고 멋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웃고 울다 보면 더위도 어느 정도는 잊힌다. 그래서 수치상의 더위와 내가 느끼는 더위는 다르다. 이리 편안하게 지내도 괜찮은지 가끔씩 미안하고 두려..

사진속일상 2024.08.19

사기[22]

전단은 성안에서 소 1000여 마리를 모아 붉은 비단에 오색으로 용무늬를 그려 넣은 옷을 만들어 입히고, 쇠뿔에는 칼날을 붙들어 매고 쇠꼬리에는 갈대를 매달아 기름을 붓고 그 끝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성벽에 구멍을 수십 개 뚫어 그 구멍으로 소를 내보내고, 장사 5000명이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꼬리가 뜨거워지자 소가 성이 나서 연나라 군대의 진영으로 뛰어드니 연나라 군사는 한밤중에 크게 놀랐다. 쇠꼬리에 붙은 횃불은 눈부시게 빛났는데, 연나라 군사가 자세히 보니 모두 용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쇠뿔에 받히는 대로 모두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장사 5000명이 나뭇가지를 입에 문 채 공격했고, 성안에서는 북을 울리며 함성을 질렀다. 노인과 아이들이 모두 구리 그릇을 두들겨 대며 성원을..

삶의나침반 2024.08.18

신의 영혼 오로라

이제는 희미해진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가 오로라 보기다. 나이가 들면 가슴 뛸 일이 하나둘씩 사라지지만 오로라 사진을 보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로라가 빛나는 북쪽 지방으로 가고 싶은 충동에 손가락은 여행사 홈페이지를 클릭하느라 바쁘다. 는 천체사진가인 권오철 선생이 자신이 직접 촬영한 오로라 사진을 중심으로 오로라를 설명하는 책이다. 오로라의 원리에서부터 오로라 여행을 위한 팁, 그리고 사진 찍는 방법까지 오로라의 모든 것을 상세히 안내해 준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선생이 추천하는 장소는 캐나다 옐로나이프다. 아이슬란드나 노르웨이도 있지만 날씨 조건이 옐로나이프가 제일 낫다고 한다. 편의 시설도 옐로나이프가 제일 잘 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옐로나이프의 오로라 여행에 대해 상술한다. 오로라는 ..

읽고본느낌 2024.08.17

지는 꽃을 보러 가자 / 최성현

다섯,혹은 열 번에 한 번쯤이라도꽃이 아니라꽃잎이 지는 것을 보러 가자 뽐내지 마라교만하지 말라죽은 날이 있다는 걸 알라고떨어지는 꽃잎이 그대에게 말하리라 내려갈 때가 있다고떨어질 때가 있다고잃을 때가 있다고꽃잎은 지며 그대에게 말하리라 있을 때 잘하라고,건강할 때 조심하라고,잃기 전에 베풀라고,땅에 떨어진 꽃잎이 그대에게 말하리라 사는 재미가 없을 때는피는 꽃이 아니라지는 꽃을 보러 가자 죽음이 언제 그대를 데려갈지 모르니즐겁게 살고감사하며 살라고지는 꽃잎이 그대에게 말하리라 - 지는 꽃을 보러 가자 / 최성현  자연농 농부인 선생은 30대 초반에 귀농해서 30년 이상 자연농법으로 자급자족 규모의 논밭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청년 시절에 자연농법을 만나 인류가 갇혀 있는 거대한 우물을 보는 경험을 ..

시읽는기쁨 2024.08.16

뜨거운 여름

올여름은 무척 덥다. 어제는 우리 지방 낮 최고기온이 35℃까지 올랐고, 서울은 36℃를 넘었다. 이번 더위는 습도가 높아서 사우나실에 있는 것 같은 찜통더위다. 기상청 자료를 보니 8월 들어 평균습도가 79%로 예년보다 훨씬 높았다. 올초 캄보디아에 갔을 때도 덥긴 했지만 가만히 있거나 그늘에 들어가면 땀이 잦아들고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하지만 습도가 높은 우리나라 더위는 그늘에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 다행히 내가 사는 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달아오른 시멘트 도시의 열기는 피할 수 있다. 낮에는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켜지만 저녁이 되면 서늘한 바람이 분다. 한밤중에는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다. 낮의 열기가 그만큼 쉬이 사그라진다. 어제 만난 서울 사는 지인은 열대야로 잠을 설친다고 불평을 했다. 바..

길위의단상 2024.08.14

애도의 문장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미수를 넘기고 올해 들면서 얼마 안 남았다는 걸 느낀다. 여기저기 아픈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몸이 전과는 또 다른 게 느껴진다. 가령 자다가 숨이 멈출 때가 가끔 있다. 숨이 멈추니까 잠결에도 답답해서 깨는데, 아마 이러다 깨지 않으면 자다가 죽게 되겠지. 사람들은, 너의 어머니도 그렇고, 자다가 죽으면 복이다, 그보다 좋은 게 어디 있냐고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사람은 짐승과 달라 살고 죽는 걸 의식하는 존재인데, 자다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 게 뭐가 좋으냐? 좀 아프더라도 죽음이 어떻게 오는지, 죽는 과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죽어야지."나는 좀 놀랐다."죽을 때 괴롭과 아픈 게 겁나지 않으세요? 요즘 사람들은 그걸 많이 걱정하고 그래서 자다 죽으면 좋다고 하는데요."..

읽고본느낌 2024.08.13

사기[21-3]

"예전에 소첩이 괄의 아버지를 모실 때, 그 무렵 제 아들의 아버지는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여 살리는 이가 수십 명이고, 벗이 된 사람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이나 종실에서 상으로 내려준 물품은 모두 군대의 벼슬아치나 사대부에게 주고, 출전 명령을 받으면 그날부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들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어 동쪽을 향해 앉아서 부하들의 인사를 받게 되었지만 군대의 벼슬아치 가운데 누구 하나 제 아들을 존경하여 우러러보는 이가 없습니다. 왕께서 내려주신 돈과 비단을 가지고 돌아와 자기 집에 감추어 두고 날마다 이익이 될 만한 땅이나 집을 둘러보았다가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어찌 그 아버지와 같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릅니다. ..

삶의나침반 2024.08.11

오리엔트 특급 살인

무더운 여름을 지내는 데는 추리 소설 읽기도 한 방법이다. 몰입도가 추리 소설 만한 게 없다. 또는 무협지도 괜찮다. 젊었을 때는 무협지를 옆에 쌓아두고 여름을 나기도 했다. 그때 생각이 나서 추리 소설 한 권을 골라 보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은 워낙 유명한 데도 책으로는 읽어보지 못했다. 오래전에 영화로 본 기억은 난다. 대체적인 내용을 알기에 흥미가 반감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기억과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특히 반전이 들어 있는 결말은 처음 대하는 듯 놀라웠다. 왜 애거서 크리스티를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 하는지 알 만했다.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폭설 속에서 고립되고 객실에서 한 사람이 칼에 찔린 채 발견된다. 마침 열차에는 푸아로 탐정이 타고 있었는데 예리한 관찰과 분석으로 사건에 얽힌 비밀을 풀..

읽고본느낌 2024.08.10

보훈공원 무궁화

무궁화가 나라꽃이지만 주변에서 무궁화를 보기가 쉽지 않다. 무궁화는 나라꽃이라는 특별한 지위만큼 사랑받는다고 보기 어렵다. 예전에 무궁화를 키우려고 했더니 사람들이 말렸다. 진드기 같은 벌레가 많이 꼬여서 지저분하다는 것이다. 무궁화는 꽃은 아름답지만 꽃나무로서는 적당하지 않다는 선입견이 있다. 가로수로도 심지 않는 걸 보니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동네 보훈공원에 가면 조형물 둘레로 무궁화가 많이 심어져 있다. 지난달부터 두 달 가까이 연이어 피고지고 하는 무궁화를 볼 수 있다. 한쪽에서는 새 꽃봉오리가 만들어지고, 일찍 피었던 다른 쪽에서는 씨가 맺힌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무궁화는 '무궁'하다고 할 정도로 오랫동안 꽃을 피운다. 쉼 없이 피고지고 또 피고 하는 것이 우..

꽃들의향기 2024.08.09

외로운 사람 / 나태주

전화 걸 때마다 꼬박꼬박 전화 받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불러주는 사람 별로 없고 세상과의 약속도 별로 많지 않은 사람이 분명할 테니까요 전화 걸 때마다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은 더욱 외로운 사람입니다 아예 전화기에서 멀리 떨어져 새소리나 바람소리, 물소리의 길을 따라가며 흰구름이나 바라보고 있는 그런 사람이 분명할 테니까요 - 외로운 사람 / 나태주 사람들의 모든 말이나 행동이 외로움을 호소하는 신호로 읽힌다. 전화를 바로 받아도 그렇고, 전화를 받지 않아도 그렇다. 단톡방에 출근하다시피 글과 영상을 퍼와서 올리는 사람도 그러하다. "나 여기 있어요!"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외치는 절규 같다. 내가 매일 블로그에 뭔가를 끄적거리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라는 걸 안다. 연락처에 전화번호가 ..

시읽는기쁨 2024.08.07

바깥은 여름

김애란 작가의 단편집이다. '입동'을 비롯해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보통은 수록된 작품 중에서 대표작을 책 제목으로 삼는데 이 책은 다르다. '바깥은 여름'은 여기 실린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를 통칭하는 말로 보인다. 이번에도 김애란 작가의 통통 튀는 경쾌한 표현들에 여러 차례 감탄했다. 하지만 작품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중심이 아닌 변두리 삶의 애환과 쓸쓸함이다. '여름'은 만물이 생기를 띄고 번성하는 계절이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삶은 겨울처럼 스산하고 춥다. 소외와 상실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첫 작품인 '입동'은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의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 어렵사리 집을 장만하고 행복해지려는 때에 후진하는 유치원 차에 치여 아들이 숨진다. 그 뒤부터 부부의 삶은..

읽고본느낌 2024.08.06

안경 다섯 개

내가 사용하는 안경 종류는 다섯 개나 된다. 그동안은 보통 안경에 선글라스, 돋보기 둘(독서용과 컴퓨터용)로 네 종류였는데 지지난달부터 고글이 추가됐다. 한참 전부터 눈물이 흐르고 충혈되는 눈 질환이 자주 찾아왔다. 안과에서는 눈물관이 막힌 탓이라고 했다. 바람을 맞으면 증세가 심해지는데 의사는 고글 쓰기를 권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안경이 생겼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섯 개 중 하나를 사용한다. 요사이는 외출할 때 주로 고글을 쓴다. 답답하기는 하나 바람을 차단하는 효과는 있다. 그래선지 최근에는 눈물이 과다하게 흐르는 현상이 생기지 않는다.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효과가 확실하다면 약간의 불편은 감내할 만하다. 20대 중반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50대까지는 안경 하나로 넉넉했다. 그러다가 ..

길위의단상 2024.08.05

슬픔의 나무

유대인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다. 사람이 죽으면 가는 천국에는 커다란 슬픔의 나무가 있는데 천사가 사람들을 이 나무 아래로 데리고 와서 말한다."자, 이제 너의 슬픔과 고통의 옷을 벗어 이 나무에 걸어 놓아라."사람들은 천사가 말하는 대로 자신이 가진 슬픔의 옷을 벗어 나무에 걸게 된다. 그리고 천사는 말한다."이제 다른 사람이 벗어놓은 옷을 골라 가져 가거라. 자신이 나뭇가지에 건 것보다 덜 슬프고 덜 고통스러워 보이는 인생이 있으면 자신의 것과 바꿔도 된다."그는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슬픔의 옷들을 살펴본다. 최종적으로 그가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 벗어 놓은 옷이다. 다른 누구의 것보다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선택하게 된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인생이 그래도 덜 불행하고 덜 고통스럽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참살이의꿈 2024.08.04

세 여자

재미있으면서 유익한 소설이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과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세 여자(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를 중심으로 풀어낸다. 남성 중심의 운동사에만 익숙한 우리 눈에 이런 여성 선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비슷한 또래의 세 여자는 20대 초반에 만나 운명적으로 얽힌다. 셋 중에서도 제일 주도적인 인물은 허정숙이다. 허정숙은 중국 상하이 유학중에 박헌영, 주세죽, 임원근, 김단야 등과 만나 사회주의연구소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몰입한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 덕분에 일본, 중국, 미국,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인텔리였다. 또한 임원근을 비롯해 네 번이나 결혼하면서 자유연애를 실천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가 활동하던  20..

읽고본느낌 2024.08.03

여름 탄천

당구 모임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반주로 소주 한 병을 겸한다. 뭐니뭐니 해도 술은 낮술이 최고다. 낮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장인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낮술에는 은퇴자라는 우리만의 특권이 있다. 주량이 많이 줄어 지금은 소주 반 병에서 한 병 사이가 적당하다. 반 병은 아쉽고 한 병이 넘으면 과해진다. 음주 실수가 잦은 편이라 절대 한 병은 넘지 않으려 한다. 낮술은 과음할 여지가 적어서 좋다. 식당에서는 마냥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없다. 밖에 나서면 환한 대낮인데다 술집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다. 동료와 헤어지고 탄천으로 산책을 나갔다. 알딸딸한 걸음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부드러웠다. 장마 그친 뒤 내리쬐는 염천의 땡볕도 상관 없었다. 여름 한낮의 산책..

사진속일상 2024.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