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소첩이 괄의 아버지를 모실 때, 그 무렵 제 아들의 아버지는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여 살리는 이가 수십 명이고, 벗이 된 사람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이나 종실에서 상으로 내려준 물품은 모두 군대의 벼슬아치나 사대부에게 주고, 출전 명령을 받으면 그날부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들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어 동쪽을 향해 앉아서 부하들의 인사를 받게 되었지만 군대의 벼슬아치 가운데 누구 하나 제 아들을 존경하여 우러러보는 이가 없습니다. 왕께서 내려주신 돈과 비단을 가지고 돌아와 자기 집에 감추어 두고 날마다 이익이 될 만한 땅이나 집을 둘러보았다가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어찌 그 아버지와 같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릅니다. 부디 왕께서는 제 아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 사기(史記) 21-3,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BC 260년에 일어난 장평(長平) 대전은 전국시대의 세력 판도를 결정한 전투였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격파함으로써 조나라는 몰락했고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다.
조나라에는 염파 장군이 있어서 전쟁 초기에는 막상막하로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조나라 효성왕이 돌연 장수를 교체했다.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염파가 아니라 조괄(趙括) 장군이라는 진나라 첩자가 퍼뜨린 소문을 믿은 것이다. 인상여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말리고 심지어는 조괄의 어머니까지 자기 아들이 지휘관이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위의 글은 조괄의 어머니가 왜 아들이 지휘관으로 부적합한지를 설명하는 말이다. 조괄은 훌륭했던 장수인 조사의 아들이었지만 인물 됨됨이는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어리석은 왕의 고집으로 인해 공격 중심 작전을 쓴 조괄의 조나라는 장평 전투에서 패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조나라 병사 수만 명이 전사하고, 포로가 된 40만 명이 생매장을 당했다. 진나라는 포로를 먹일 식량이 부족하자 포로들이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후 묻어버린 것이다. 장평 대전은 전국시대에 진나라가 최후의 패권국이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평 대전은 어리석은 왕이 충언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대제국도 못난 지도자를 만나면 쉽게 허물어진다. 명 말기의 만력제를 봐도 알 수 있듯 이런 예가 한둘이 아니다. 현대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5년마다 왕(?)을 교체할 수 있다. 갈지자 행보를 하긴 하지만 어쨌든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을 향해 굴러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