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15

깊은 밤 / 도종환

어려서 아버지께 편지를 자주 쓴 것첫 줄을 쓰기 위해 별을 올려다본 것슬픈 밤마다 별들과 가만히 눈을 맞춘 것실패한 아버지를 찾아 떠도는어머니가 보고 싶어 혼자 조용히 운 것수업 시간에 창 밖을 자주 내다본 것화폭에 칠한 색감에 몰입하는 시간이 좋았던 것수시로 도서실로 달려가던 오후'사랑이 무성한 수풀' 같은 소설 제목에 끌려무성한이란 말과 수풀에 대해 수많은 상상을 한 것나이 들어서 결국 숲속에서 살게 되었고영혼을 편하게 하는 일이 숲의 일이란 걸 알게 된 것내 인생에서 잘한 일을 들라면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진 것인내의 길이를 길게 늘여가는 게 시간이고시간이야말로 은혜롭다는 것시간이 사람을 깊게 한다는 말을 믿은 것어머니에게 여린 마음의 씨앗을 물려받은 것그 씨앗이 자라제비꽃 ..

시읽는기쁨 2024.09.15

추석 연휴 첫날의 동네 산책

추석 연휴 첫날에 우리 동네와 뒷산길을 산책하다. 고향에는 내일 내려갈 예정이라 오늘은 태풍 전야처럼 고요하다. 내일은 교통 상황을 살펴 정체 없는 시간을 택해 출발해야겠다. 명절이 다가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아내도 나도 마찬가지다. 도로 정체는 차치하고 우선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이 피곤하다. 억지로 의무방어전을 치러야 하는 기분이다. 젊을 때도 그랬고 늙어서도 다르지 않다. 지금은 고향 상황이 서먹하게 변했고 찾아가는 설렘이나 활기가 사라졌다. 사람의 도리이니 안 할 수가 없는 그런 의무 비슷한 것이다. 숲길에 있는 벤치에 누워 나무 사이로 떠가는 구름을 바라본다. 나날살이가 부운(浮雲)과 같지 않으랴. 바람 부는 대로 정처 없이 흘러갈 뿐이다. 구름을 이루는 입자들은 제 잘 난 줄 알고 이리저리..

사진속일상 2024.09.14

사기[24-1]

굴원은 강가에 이르러 머리를 풀어헤치고 물가를 거닐면서 읊조렸다. 그의 얼굴빛은 꾀죄죄하고 모습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야위었다. 어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굴원이 대답했다."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소."어부가 물었다."대체로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 받지 않고 속세의 변화를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옥처럼 고결한 뜻을 가졌으면서 스스로 내쫓기는 일을 하셨습니까?"굴원이 대답했다."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

삶의나침반 2024.09.14

그때가 좋은 거야

추석이 다가왔다. 고향에 노모가 계시니 명절이 되면 찾아뵙는 문제로 고민한다. 동생들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니 명절이 되면 근심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다. 올 추석은 내가 내려가야 할까 보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 친구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은 찾아오는 자식들과 단출하게 추석을 보낸다. 연휴를 이용하여 가족이 함께 놀러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일순위가 어머니이니 자식들과의 만남은 뒤로 미루어진다. 지난 몇 차례는 동생이 어머니와 있어준 덕분에 예외가 있기는 했다. 어제 친구들 모임에서 추석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노모를 뵈러 고향에 내려가야 하는 경우는 나밖에 없었다. 언제 내려가고 언제 올라올지 교통 정체도 걱정이다. 이런저런 넋두리를 ..

참살이의꿈 2024.09.13

해리스 vs 트럼프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인 해리스(Kamala Harris)와 트럼프(Donald Trump)의 미국 대통령 선거 TV 토론이 어제 있었다. 우리 시간으로 아침 10시에 시작했는데 생중계를 보느라 처음부터 끝까지 TV 앞을 지키고 있었던 건 처음이었다. 남의 나라 정치 쇼에 내가 왜 이렇게 관심이 큰지 나 스스로도 의아했다. 해리스라는 새로 등장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컸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 트럼프는 워낙 비호감이라 해리스를 응원하며 토론을 지켜봤다. 노회한 트럼프를 여유 있게 상대하면서 토론을 주도해 나가는 해리스가 멋있었다. 부드러우면서 강인해 보이는 이미지도 좋았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선거에서 해리스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면 좋겠다. 미국의 국내 정책에 대한 논쟁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

길위의단상 2024.09.12

청춘유감

청춘이 지나간 지는 아득하다. 나에게도 청춘이란 시절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래도 청춘이란 말을 들으면 심장이 고동친다. 청춘의 청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지만 지금은 청춘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 부득이 책을 통해서 청춘을 만날 수밖에 없다. '청춘(靑春)'이라는 말에 끌려 고른 책이 이다. '유감'은 섭섭하거나 불만이 담겨 있는 '遺憾'이 아니라 무감의 반대말로서의 '有感'이다. 지은이는 한국일보 문학 담당 기자로 재직하는 한소범 씨다. 30대 초반의 젊은이로 자신이 통과한 소녀와 청년 시절의 꿈과 좌절, 희망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현실에 적응해 가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일종의 성장기로 볼 수도 있다. 지은이는 소설가와 영화 제작에 도전하다가 꿈을 접고 신문 기자가 되었다...

읽고본느낌 2024.09.11

식당 / 프란시스 잠

나의 식당에는 빛바랜 그릇장이 하나 있지요.그는 나의 고모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나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고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이 장은 이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요.만일 사람들이 이 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지요.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 식당에는 또 나무로 된 뻐꾸기시계가 하나 있지요.나는 이 시계가 왜 이제는 목소리가 없어졌는지 알 수 없어요.그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구요.아마 태엽 속에 담겼던 목소리가 깨어졌겠지요.그저 죽은 사람이 목소리가 없어진 것같이. 거기에는 또 낡은 찬장이 하나 있지요.그 속에는 밀랍, 잼,고기, 빵, 그리고 무른 배 냄새가 납니다.이 찬장은 충직한 청지기로 이 집에서어떤 물건도 훔쳐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우..

시읽는기쁨 2024.09.10

민영환 묘

용인에 간 길에 마침 민영환 선생 묘가 부근에 있어 들렀다. 충정공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선생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이다. 선생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있다. 선생은 동부승지, 이조참판, 한성부윤 등의 요직을 지냈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도 참석하는 등 일찍이 서구 문명을 접하며 나라의 개혁에 앞장섰지만 친일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리며 항의했으나 실패하자 동포와 각국 공사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묘소 비문에는 선생의 유언이 새겨져 있다.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가운데에서..

사진속일상 2024.09.08

디 아워스, 내 사랑, 케빈에 대하여, 어느 가족

디 아워스, 내 사랑, 케빈에 대하여, 어느 가족 - 뜨거웠던 올여름에 본 영화들이다. 밖은 펄펄 끓는데 거실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1. 디 아워스  1920년대의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1950년대와 2000년대를 살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그려진다. 여성의 삶이란 무엇인지, 여성으로서의 고민과 불안 등 정체성을 묻는 영화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고통과 속앓이를 잘 표현했다. 제도적 관습과 틀 안에서 해방을 꿈꾸는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일부분이나마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2. 내 사랑  캐나다 화가인 모드 루이스(Maud Lewis, 1903~1970)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모드 루이스를 처음 알게 되었..

읽고본느낌 2024.09.07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대학생 때 파동 수업을 들을 때로 기억한다. 교수님이 이렇게 물었다."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졌다면 소리가 났을까? 안 났을까?"우리는 왈가왈부하면서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곧 이 질문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관점을 묻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넷플릭스에서 8부작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를 봤다. 제목만으로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위의 질문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동시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50여 년 전에 강의실에서 받은 질문을 똑 같이 드라마에서 만날 줄이야. 드라마는 20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우연히 마주한 사건으로 인해 모텔 주인의 삶은 풍비박산이 나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대처 방식을 다루는 드라마다. 누군..

길위의단상 2024.09.06

사기[23-2]

"오늘날 임금들은 천하의 뛰어난 선비들을 무거운 권력에 눌려 엎드리게 하고, 세력 있는 지위만을 제일로 여기므로 얼굴을 돌려 행실을 더럽히면서까지 아첨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섬기게 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친하고 가깝게 하기를 밟니다. 이렇게 된다면 뜻있는 선비들은 바위 굴 속에서 엎드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충성과 신의를 다하여 대궐 밑으로 들어가는 자가 있겠습니까?" - 사기(史記) 23-2,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추양(鄒陽,  BC 206~129)은 제나라 사람으로 양나라 효왕의 문객으로 있었다. 그런데 추양을 시샘하는 자들이 참소를 하여 옥에 갇히게 되고 왕은 죽이려고 했다. 추양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될까 봐 옥중에서 왕에게 자신의 심정을 밝히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

삶의나침반 2024.09.05

풍경(56)

모래톱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리들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스르르 몸을 일으켜 물로 피한다. 멀리서는 백로 두 마리가 한가로이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슬로우 모션을 보는 듯한 늦여름 오후의 경안천 풍경이다. 손님을 기다리다 지친 무수리 나루터의 줄배는 오수에서 깨어날 줄 모른다. 번잡한 세상에서 조금만 발길을 옮겨도 이런 천고수청(天高水靑) 속 적막강산이 있다.

사진속일상 2024.09.04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대학생 때 다니던 교회 청년회 모임에서 한 달에 한 명씩 신앙의 선조들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다. 루터, 칼뱅, 웨슬리 등을 다루었는데 칼뱅에 대해서는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위대한 신앙인이었다는 이미지가 그때 새겨졌고 오래 유지되었다. 뛰어난 개신교 이론가였던 칼뱅은 제네바를 신이 다스리는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칼뱅이 저지른 오류에 대해서 그때는 알지 못했다. 분명 칼뱅의 선한 의도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자료만 제공받았을 것이다. 악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폭력이 필요하다고 수긍했을 수도 있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인물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칼뱅도 마찬가지다.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는 칼뱅의 종교적 독단에 반대하며 관용의 정신을..

읽고본느낌 2024.09.03

올림픽공원 벌개미취

30분 정도 올림픽공원을 산책했다. 모임에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 공원에 핀 꽃을 느긋하게 살펴 볼 여유는 없었다. 지나는 길에 잠깐 눈맞춤을 한 벌개미취다. 아침에 내린 비의 흔적이 아직 꽃잎에 남아 있었다. 벌개미취를 보니 가을이 한 발짝 더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벌개미취는 가을이 왔음을, 구절초는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알려준다. 올가을은 고운 보라색 벌개미취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맞는다. 더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있는 그대로 너 또한 아름답다고 여린 벌개미취가 가만히 내 귀에 속삭여주는 말을 들었다.

꽃들의향기 2024.09.02

가을 오는 하늘

가을이 몇 발자국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한낮 햇살은 따가워도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선선해졌다. 매미 소리는 잦아들고 풀벌레들 노랫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간다. 하늘도 가을이 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뜨거운 열기에서 벗어났는지 더 푸르러 보이고, 구름 모양도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붓을 부드럽게 터치해서 그린 듯한 권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에 하늘을 자주 쳐다봤다.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움직임이 재미있었다. 꽤 오래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구름이 있는가 하면, 어떤 구름은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금방 변신을 했다. 하늘이 연출하는 변검술이었다. 하늘 하나만으로도 오가는 길이 즐거웠다. 이 또한 파적(破寂)의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흐뭇해하면서.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사진속일상 2024.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