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리 작가의 소설을 두 권 읽었다.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일곱 권의 작품을 남기고 요절한 은둔 작가였다는 프로필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작인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다음에 읽어보기로 하고 남겨둔다.
작가는 문학 수업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두 작품이 주는 신선한 느낌이 좋았다. 작가의 첫 작품은 <합체>인데 2010년에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심심풀이로 썼다는데 수상을 하고 주목을 받은 걸 보면 타고난 작가로서의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맨홀>은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가정폭력의 희생자면서 가해자가 된 사연을 아프게 그려낸 소설이다. 소방관인 아버지는 가정을 지옥으로 만드는 폭력을 행사한다. 어머니는 무기력해서 아무 대응을 못하고 누나와 주인공은 둘 만의 피난처인 맨홀 속으로 도망 다니며 황폐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화재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순직하며 영웅이 된다. 어머니와 누나는 아버지를 용서하려고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지 못한다. 비행 친구들과 어울리던 주인공은 급기야 외국인 근로자를 죽이는 범죄를 저지른다.
읽는 내내 주인공이 안스러웠고 전개되는 사태에 침울했다. <맨홀>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드러내는 일종의 사회 고발 소설이다. 책 뒤의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재작년 가을 즈음이던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발밑에 있는 맨홀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조금 미뤄 뒀다가 작년 초여름부터 두세 시간씩 매일 썼다."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맨홀>과 달리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풍자와 해학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씩씩한 할머니인 양춘단이 대학의 청소노동자로 근무하면서 목도하는 부조리를 고발한다. 이 소설은 후반부에 가면서 긴장감이 떨어져서 아쉽다.
양춘단과 대학 시간강사가 나누는 대화 중에 이런 게 있다. 이상이 뭔지, 어떻게 살아본 적도 없는 세상을 그리워할 수 있는지를 묻자 시간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만난 적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그리워하고, 살아본 적 없는, 저 달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세상을 그리워하는 걸 이상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요?"
결국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인간이 꿈꾸는 이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이상은 차가운 현실에 부딪쳐서 좌절되고 부서지는 운명이겠지만.
우연한 기회에 박지리라는 작가를 알게 되고 그녀의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작가는 31세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떴다. 그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늘나라에서는 안식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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