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다.
사람이 죽으면 가는 천국에는 커다란 슬픔의 나무가 있는데 천사가 사람들을 이 나무 아래로 데리고 와서 말한다.
"자, 이제 너의 슬픔과 고통의 옷을 벗어 이 나무에 걸어 놓아라."
사람들은 천사가 말하는 대로 자신이 가진 슬픔의 옷을 벗어 나무에 걸게 된다. 그리고 천사는 말한다.
"이제 다른 사람이 벗어놓은 옷을 골라 가져 가거라. 자신이 나뭇가지에 건 것보다 덜 슬프고 덜 고통스러워 보이는 인생이 있으면 자신의 것과 바꿔도 된다."
그는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슬픔의 옷들을 살펴본다. 최종적으로 그가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 벗어 놓은 옷이다. 다른 누구의 것보다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선택하게 된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인생이 그래도 덜 불행하고 덜 고통스럽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도착했을 때보다 한결 더 지혜로워져서 슬픔의 나무를 떠난다고 한다.
누구나 자신의 슬픔과 고통이 가장 크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자기 손가락을 찌르는 작은 가시 하나가 타인의 목숨이 달려 있는 중한 병보다 더 아픈 법이다. 타인에 대해서 느끼는 연민이나 동정은 어쩌면 감정의 사치인지 모른다. 인간은 그만큼 자기중심적이다.
문지방을 넘으면 어느 집이나 겪는 우환이 보인다고 한다. 거저 사는 인생은 없다. 겉으로 보이는 타인의 행복한 삶에 현혹되지 말라. 누구나 나름의 슬픔과 고통, 안타까움 속에서 살아간다. 세상에서 자기만 유독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은 망상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한결 더 지혜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고(苦)와 쾌(快)! 이 두 가지가 우리 인생에서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인생고가 아무리 깊다 한들 내내 그 속에서 허우적댈 수는 없다. 나름의 즐거움과 보람을 찾으며 살아가야 한다. 어쨌든 우리 삶의 임무는 고(苦) 위에 쾌(快)를 건설하는 일이다. '슬픔의 나무'가 전해주는 지혜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타인에 대해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낄 때 - 그런 사람이 많아질 때 - 이 세계는 그런대로 살아갈 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