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변하면서 사람들이 쓰는 말도 달라진다. 새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옛날에는 자주 썼는데 지금은 빈도가 확 떨어진 말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속물'이다. 전에는 "속물 같은 놈"이라고 흔히 말했는데 요즘은 좀체 듣기 어렵다. 과연 속물이 줄어들어서 그런 걸까?
속물(俗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교양이 없으며 식견이 좁고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에만 마음이 급급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다. 속물근성(俗物根性)이라는 말도 있는데 '금전이나 명예를 제일로 치고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는 생각이나 성질'이다. 속인(俗人)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지만 인(人) 대신 물(物)이 붙으면 한마디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속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모욕을 느낄 만하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염치가 있기 때문이다. 속물한테서는 염치나 겸양의 미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내면보다 돈, 능력, 성공 여부로 사람을 판단한다. 소유물이나 사회적 지위가 인간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명품을 가지려 하고 성형을 해서라도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려 한다. 어쩌다 보니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인정하고 부러워하게 되었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니 누구나 속물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다. 인간의 도리나 염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대발전재단에서 서울대 재학생 부모들에게 서울대생의 부모란 것을 알릴 수 있는 차량용 스티커를 나누어 주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원형의 스티커에는 서울대 마크와 함께 'PROUD PARENT(자랑스러운 부모)'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아무리 지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설마 이걸 차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까. 자식을 서울대에 보내지 못한 수십만 명의 학부모는 무엇이란 말인가. 대학, 그것도 서울대에서 이런 발상을 한다는 자체가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속물의 특징은 염치없으며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속물 같은 놈"이라는 말 속에는 보통 사람들의 자긍심이 들어 있었다. 비록 내가 돈이 없고 지위가 낮아도 저따위로는 살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이었다. 돈은 없어도 마음은 부자였다. 그러나 현대에 들면서 이런 자긍심마저 부자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몫이 되었다. 성공하지 못하면 루저인 것이다. 속물이라고 불러도 좋다, 돈만 많다면 무엇이라도 되겠다, 현대인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이런 세상에서 루저의 자긍심은 초라한 자기 위안에 불과하게 된다.
얼마 전에 김수영 시인의 글을 읽었다. 1967년에 쓴 '이 거룩한 속물들'인데 그중 한 대목은 이렇다.
"모두 다 속물을 만들어라. 모두 다 유명하게 만들어라. 간판이 너무 많은 종로나 충무로 거리에서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저 간판을 늘려라. 하나님은 오늘날의 속물의 근절책으로 이 방법을 시험하고 있고,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의 예언대로 모두가 속물이 된 시대가 되었다. 너나 없이 속물들이니 아무도 이제는 서로를 속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드디어 속물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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