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애도의 문장들

샌. 2024. 8. 13. 10:17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미수를 넘기고 올해 들면서 얼마 안 남았다는 걸 느낀다. 여기저기 아픈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몸이 전과는 또 다른 게 느껴진다. 가령 자다가 숨이 멈출 때가 가끔 있다. 숨이 멈추니까 잠결에도 답답해서 깨는데, 아마 이러다 깨지 않으면 자다가 죽게 되겠지. 사람들은, 너의 어머니도 그렇고, 자다가 죽으면 복이다, 그보다 좋은 게 어디 있냐고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사람은 짐승과 달라 살고 죽는 걸 의식하는 존재인데, 자다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 게 뭐가 좋으냐? 좀 아프더라도 죽음이 어떻게 오는지, 죽는 과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죽어야지."

나는 좀 놀랐다.

"죽을 때 괴롭과 아픈 게 겁나지 않으세요? 요즘 사람들은 그걸 많이 걱정하고 그래서 자다 죽으면 좋다고 하는데요."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셨다.

"이 정도 살고 이런저런 재미도 보았으면 죽을 때 좀 괴롭기도 해야지, 어떻게 영 안 아프길 바라겠니. 나랑 종종 바둑을 두는 친구가 있다. 나이는 나보다 젊지만 사람이 참 점잖아. 그이가 교회 장로인데 하루는 '지금이라도 하나님 믿고 천당 가라'고 전도를 하더라. 그래서 내가, 이 나이까지 이 정도 누리고 살았으면서 죽은 담에 천당 가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천당이 있다면 거기엔 이승에서 나보다 더 힘들게 산 사람들이 가야지 내가 천당까지 욕심내면 안 된다고 했지. 그러니까 그이가 다시는 교회 가란 말 못하겠다고 하더구나."

"나는 죽는 걸 보고 느껴서 네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관심이 많으니까. 근데 문제는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기운이 없어 말을 못하더라.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실 때 말씀을 못하고 눈물만 흘리시더구나. 그래서 말을 못하게 됐을 때 어떻게 그걸 알려줄지 그게 고민이다. 물감 같은 걸 옆에 두고 있다가 그려서 보여주나?"

그러면서 빙그레 웃으셨다. (다음번에 아버지와 만나면 그럴 때를 대비한 수신호를 미리 정해둘까 싶다.)

또 말씀하시길,

"요즘은 생각이 많다. 거의 잡생각이지. 눈이 침침해지고 어지러워 책을 읽을 수가 없어 그런 것인데, 처음엔 책을 못 읽는 것이 한심했다. 책도 못 읽고, 살아도 산 게 아니구나 싶고, 그러다 내가 이 나이에 책은 더 읽어 뭐하나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사람은 다 저 편한 대로 합리화를 하는 거야. 아무튼 이 생각 저 생각 하다보면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잘못한 일이나 나쁘게 했던 사람이 떠오르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른다. 요즘 들어 가끔 내가 끔찍하게 여기는 장면이 보이기도 하고 헛것이 보일 때가 있는데, 그러니 더욱 착하게 살아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니?"

내가 물었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후세계란 것이 있을까요?"

"나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요즘 들어 부쩍 죽는 게 무섭고 자다가도 두려울 때가 있어요. 지금 잠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이런 두려움을 아버지도 느끼시나요?"

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잠시 그런 거다. 나는 지금 안 그러지. 죽는 게 겁나고 죽기 싫고 그러진 않는다. 그건 걱정 마라. 나처럼 이렇게 원대로 살고 나면 죽음이 무섭고 싫고 하진 않는다. 내가 잘 보고 겪어서 알려줄 테니 너는 걱정 마라."

 

이 책 첫머리에 나오는 아버지와 딸의 대화다. 이 대목 하나만으로도 책에 확 끌려 들어갔다. 지은이인 김이경 작가는 마지막을 향해 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죽음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애도의 문장들>은 그 과정에서 느끼고 알게 된 후회와 배움에 대해 쓴 책이다. 앞서 간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남긴 많은 자료를 담았다.

 

죽음에 관한 수많은 담론이 있지만 인간이 구체적인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은 별반 없다. 타인의 죽음을 피상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작가의 말대로 죽음은 '어두운 추상'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죽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좀 더 나은 마음가짐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작가는 말한다.

"왜 죽음을 공부하느냐고? 나를 알기 위해서.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택하지 않았으나 내가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이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오늘도 죽음을 고민하고 공부한다. 부디 이 공부가 죽음에 이르기 전에 흔쾌한 미소로 끝날 수 있기를."

 

지은이는 현실적으로 좋은 죽음이란 드물다는 것을 인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혼란과 갈등, 어둠과 고통이 통째로 드러나는 죽음은 상상 이상의 충격을 준다. 죽음을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은 충격을 덜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죽음을 공부하는 것은 충격을 받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함을 아는 것이다. 이 앎은 자신을 견디고, 서로를 견디고, 묵묵히 슬픔을 받아들이게 한다. 몽테뉴는 말했다. "철학이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다정한 아버지와 딸 관계가 부러웠다. 책은 '울다' '배우다' '읽다'의 세 파트로 되어 있는데, 그중 '울다'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도 일기다. 작가는 아버지를 인생과 죽음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자 벗이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부녀 관계가 어디 흔한 일인가.

 

지은이는 죽음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참고 서적을 추천한다.

 

- 숨결이 바람 될 때 / 폴 칼라니티

- 안나 카레니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 / 톨스토이

- 다 잘된 거야 / 엠마뉘엘 베르데임

- 가족의 죽음 / 제임스 에이지

- 삶과 죽음 사이에 서서 / 어빈 얄롬

- 존엄한 죽음 / 최철주

- 좋은 죽음 나쁜 죽음 / EBS

- 여러분 죽을 준비 했나요 / 스터즈 터클

- 죽음과 죽어감 / 엘리자베스 로스

-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 셔윈 놀랜드

-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아툴 가완디

- 참 괜찮은 죽음 / 헨리 마시

- 도시에서 죽은다는 것 / 김형숙

-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 / 윤영호

-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 / 허대석

- 삶의 마지막에 마주치는 10가지 질문 / 오츠 슈이치

- 인간답게 죽는다는 것 / 야마가타 켄지

- 평온한 죽음 / 나가오 가즈히로

-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 로버트 버크만

-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꼭 해야 하는 이야기들 / 안젤로 볼란데스

-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 정현채

- 13가지 죽음 / 이준일

-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 수 클리볼드

- 내 아들이 꿈꾸는 세상 / 아나기다 구니오

- 죽은 자들의 웅성임 / 이소마에 준이치

-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 / 김석중

- 죽음이 삶에게 안부를 묻다 / 김경환

- 죽어가는 자의 고독 / 노베르트 엘리아스

- 죽음의 역사 / 필리프 아리에스

- 죽음의 부정 / 어니스트 베커

- 안락사의 역사 / 이안 다우비긴

-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 조지 월드

 

- 나의 아름다운 죽음을 위하여 / 고광애

-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 김열규

- 좋은 이별 / 김형경

- 어머니의 죽음 / 데이비드 리프

- 아주 편안한 죽음 / 시몬 드 보부아르

- 자유죽음 / 장 아메리

- 죽음의 얼굴 / 최문규

- 삶을 여행하는 초심자를 위한 죽음 가이드북 / 최준식

- 티벳 사자의 서 / 파드마삼바바

- 아버지의 유산 / 필립 로스

- 메이블 이야기 / 헬렌 맥도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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