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이여
너를 맞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새이
절깐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 한다
- 가벼히 / 서정주
'가볍게'나 '가벼이'가 아니고'가벼히'다. 시인이 골라 썼을 이 특별한 시어에 자꾸 눈이 간다. '맞날' '인젠' '새이'도 마찬가지다. 이 시가 주는 분위기와 시어의 선택이 절묘하다.
사랑이란 집착이나 소유가 아니다. 그런 사랑은 깨어지기 쉽다. 풀잎사귀 하나 같은 사랑이라면 거센 폭풍우가 닥쳐도 누울 뿐 부러지지는 않는다. 인연의 소중함도 그러하다.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것일 뿐 거기에 천만 금의 무게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연은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 같은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생과의 이별도 아무 여한이 없으리라. 가벼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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