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한낮에 내리는 눈을 본다. 살포시 내리는 작은 눈송이는 땅에 닿자마자 녹으면서 흔적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체에서 액체로 상태만 변했을 뿐이다. 사람의 죽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물끄러미 바라본다.
젊었을 때 이 시를 만났다면 '임'은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이로 연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임'이 머뭇거림 없이 죽음과 연결되는 어떤 존재로 읽힌다. 절대자일 수도 있고, 어머니 같은 자연의 품일 수도 있다. 이 세상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늘 같이 따스한 겨울날, 부드럽게 내리는 눈이 착지하자마자 녹아 형태를 잃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은행잎처럼, 초승달처럼, 흐르는 물처럼, 햇볕처럼, 임이 부르신다면 그렇게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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