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랑의 끝판 / 한용운

샌. 2024. 2. 7. 10:38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라다가 초를 거꾸로 꽂었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겄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緩急을 읽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을 읽었다. 88편의 시가 실린 시집은 '님의 침묵'으로 시작하여 '사랑의 끝판'으로 끝난다. 만해는 1925년에 백담사에 기거하며 이 시들을 썼다. 시집 전체를 읽어 보면 시인이 시를 쓴 의도나 목적이 어렴풋이나마 감지된다. '님의 침묵'에서 이별과 그리움을 노래하지만, '사랑의 끝판'에서는 만남에 대한 기대와 벅찬 희망을 표현했다.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편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만해는 시집 처음에 나오는 '군말'에 이렇게 적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한다면 상실과 안타까움에 젖었을 시인의 심정이 충분히 읽힌다. 그리움은 다시 만날 것에 대한 희망을 전제로 한다. 그런 희망이 없다면 좌절과 절망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어둠이 가고 이제 '새는 빛'이 비친다. 닭장의 닭은 몸을 뒤척이고 마굿간의 말은 굽을 친다. 님이 오시고 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환희에 차서 내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오른다. 새 날이 밝고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현실이 삭막할지라도 과거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그리움과 함께 꿈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다 왔다 싶은 지금은 오히려 캄캄하다. 세상이 어디로 나아가려는지 비관이 앞선다. 시대가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나이 탓일까.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도 만해는 새는 빛을 보았다. 작금의 현실과 겹쳐서 착잡하게 읽게 되는 '사랑의 끝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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