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오백년 도읍지를 / 길재

샌. 2024. 1. 29. 11:42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오백년 도읍지를 / 길재

 

 

길재(吉再, 1353~1419)는 고려 말과 조선 초를 살았던 성리학자다. 고려가 망해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가 초야에 묻혔다. 선생의 나이 40세 때 고려가 망했고, 교분이 두터웠던 이방원이 그를 개경으로 초대하여 함께 일하자고 했으나 뿌리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응하기만 했다면 부귀영광은 절로 굴러들어왔을 것이다. 이 시조는 이방원의 초청으로 옛 왕도였던 개경을 방문했을 때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초야에 묻혀 곧게 살아간 선생의 맑은 기상이 드러나는 한시 '한거(閑居)'다.

 

臨溪茅屋獨閑居

月白風淸興有餘

外客不來山鳥語

移床竹塢臥看書

 

개울가에 초가 짓고 한가히 홀로 사니

달 밝고 바람 맑아 즐거움이 넘쳐나네

찾아오는 손님 없어 산새들과 벗하고

대숲으로 평상 옮겨 누워서 책을 읽네

 

왕조가 교체하는 혼란기에 처한 지식인들의 태도는 각자 달랐다. 정도전의 길이 있고, 정몽주의 길이 있고, 길재와 같은 길도 있었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느 길을 택했을까를 생각한다. 누가 어떤 선택을 하든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제 갈 길을 갔을 것은 분명하다.

 

요사이는 계속 앙코르 유적지에 다녀온 느낌에 젖어 있다. 길재의 이 시조는 따프롬에 갔을 때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앙코르 왕조도 오백년을 지속하다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 따프롬의 무너진 건물을 거대한 나무 뿌리가 감싸안고 있는 풍경에서 허망한 인간의 길과 유구한 자연의 길의 대비가 선명했다. 개인이든 문명이든 인간사란 몽롱한 신기루인지 모른다. 넓게 보면 아쉬워할 것도 한탄할 것도 없는 세상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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