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휘트먼

샌. 2024. 2. 25. 11:50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증거와 숫자들이 내 앞에 줄지어 나열되었을 때

더하고, 나누고, 계량할 도표와 도형들이 내 앞에 제시되었을 때

그 천문학자가 강당에서 큰 박수를 받으며 강의하는 걸 앉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없게도,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온 뒤, 나 홀로 거닐면서

촉촉히 젖은 신비로운 밤공기 속에서, 이따금

말없이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월트 휘트먼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When the proofs, the figures, were ranged in columns before me;

When I was shown the charts and the diagrams, to add, divide, and measure them;

When I, sitting, heard the astronomer where he lectured with much applause in the lecture room,

How soon, unaccountable, I became tored and sick;

Till rising and gliding out, I wander'd off by myself,

In the mystical moist night-air, and from time to time,

Look'd up in perfect silence at the stars.

 

-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 Walt Whitman

 

 

이성주의자인 칸트에 대한 그럴듯한 일화가 있다. 청년 시절에 칸트를 좋아하는 한 여인이 청혼을 했다. 신중한 칸트는 결혼이 무엇인지 검토를 한 다음에 답을 주겠다고 했다. 칸트는 결혼에 관한 모든 책을 읽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결혼의 장단점을 연구했다. 신중한 이론적 분석을 한 끝에 결혼했을 때의 장점이 결혼하지 않았을 때의 단점보다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동안에 여러 해가 흘러갔다. 칸트가 여인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 여인의 아버지가 나와 말했다고 한다. "너무 늦었소. 내 딸은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네."

 

사람의 일이란 이론이 아니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숫자와 증거와 팩트 만으로 우주의 신비가 해명될 수 없다. 어쩌면 사실보다 느낌이 더 중요할 지 모른다. 박식한 천문학자의 강연장을 빠져나올 때 휘트먼이 느낀 공허는 과학 만능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심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지루하고 따분한 말장난에서 벗어나 말없이 올려다본 하늘의 별이 주는 따스함과 위안이 그리워지는 이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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