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젊은 날의 초상

샌. 2022. 12. 1. 09:49

내 젊은 날의 노트를 열어본다. 노트 안에는 진리를 향한 갈구에 목말라하던 20대 초반의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중에서 49년 전인 1973년 11월 30일의 일기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하는 C'라고 부르면서 적은 글이다.

 

그 시절에 나는 인간과 세계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철학적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질문에 답해주는 것이 진리였다. 진리는 반드시 존재하고 그걸 발견하는 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라고 믿었다. 진리야말로 무명의 세상을 비추는 횃불이었다. 내가 볼 때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 정신의 금자탑이 철학이었다. 철학 사상을 파고들면 나름대로 진리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철학과 기독교 사상에 몰두했다. 전공 공부는 아예 도외시했다.

 

얼마 전에 대학 동기들과 만난 자리에서 엉뚱한 논쟁이 일었다. 나와 S 중에서 누가 꼴찌로 졸업했느냐는 것을 두고 설왕설래한 것이다. 그때는 성적순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에 일선 학교에 나간 날짜를 보면 유추가 가능했다. 성적이 좋은 친구는 졸업하자마자 발령이 났고, 그렇지 못하면 빈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성적이 나빠도 1년 정도면 순서가 돌아왔다. S는 11월 모일에 -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 발령을 받았다면서 자신이 꼴찌라고 알고 있었다. 내가 12월에 발령을 받았다니까 깜짝 놀랐다. 꼴찌의 영예를 빼앗긴 때문이었을까. (이 부분에서는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10월에서 12월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어찌 됐든 대학생 때 성적은 지하실 바닥이었다.)

 

지금 돌이켜 봐도 그 시절 고뇌와 방황의 날들이 칼날처럼 내 가슴을 찌른다. 갈 길 잃고 헤매던 그 연약한 젊은이를 다시 만난다면 꼭 껴안아주고 싶다. 그렇게 유심론적 세계에 빠질 것까지는 없었다고, 어둔 방에서 나와 밝고 따스한 햇살을 즐기라고 속삭여주고 싶다. 그러나 그 젊은이가 내 충고를 받아줄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더 고뇌하고 더 아파하고 더 고독하라고 말해주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그 시절 노트에서는 지적인 광기마저 느껴져 섬뜩하다.

 

이 일기에 쓰인 C는 누구였을까? 책에서 만난 스승의 이니셜일까? 그 즈음의 일기를 보면 니체, 쇼펜하우어, 사르트르를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보내는 독백 형식으로 된 글은 자주 썼다. 이 일기도 그런 글 중 하나일까? 아니면 마음에 품고 있던 실제 인물이었을 수 있다. "C"로 시작하는 한 여성이 안갯속에서 떠오른다. 하면 그녀에 대한 감정이 이런 토로를 할 정도로 애틋했단 말인가. 그도 아니라면 상상 속 가상의 인물일까?

 

지금의 나는 49년 전보다 얼마나 더 앞으로 나아갔을까를 생각한다. 그 사이에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진리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청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나 싶다. 용이 되지 못한 뱀은 그저 능구렁이가 되어 능글능글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1973/11/30

 

그대 친애하는 C에게 씁니다.

흰 눈 나리는 가로수 길로 그대와 함께 걸을 때 그대의 따스한 입김에 나의 가슴은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읍니다. 그대의 다정한 미소와 사랑스러이 울려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나의 감각은 마비되고 오직 그대에게만 열려져 있었읍니다. 또한 그대의 눈가를 맴돌던 야릇한 미소, 그 눈웃음을 바로 쳐다보기가 나에게는 얼마나 거북했던가요. 그 때 나는 그대를 껴안을 뻔 했읍니다. 오, 나는 그대 곁에 있을 때만이 고뇌를 잊게 되고 나의 가슴은 환희로 가득 찹니다. 그대의 고운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나의 찢어진 정신을 꿰매는 신비의 바늘이었읍니다. 그대 곁에 있을 때에는 저 무시무시한 현실 세계를 상상해 보지도 못했읍니다. 오직 그대를 만난 것에 뜨거운 눈물이라도 흐를 듯 나의 마음은 감격 그것이었읍니다.

 

사랑하는 C!

나는 외롭고 슬퍼집니다. 갑자기 뭍으로 튀어 나온 물고기와도 같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나의 정신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읍니다. 구원의 손길은 보이지 않고 막혀진 갱내에서 탁해져 가는 공기를 마시며 몸부림치는 광부와도 같이 나의 정신은 절망으로 가득차 있읍니다. 아, 저 거대한 형상으로 나에게 덮쳐오는 현실계의 모습. 나는 이제 거기에 오한을 느낄 정도로 몸서리쳐 집니다. 무섭읍니다. 시커먼 모습으로 온통 의무로 둘러싸인 괴물은 나의 꿈에 까지 와서 나를 괴롭히고 있읍니다.

한 때 이상의 횃불이 나의 앞길을 비쳐주고 그것은 곧 나의 여로의 좌표가 되었읍니다. 나는 어린 아이의 순진한 즐거움으로 거기에 매달렸읍니다. 나의 사랑은 理想이었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눈멀게 한다고 했듯이 나는 나의 주위로 무한대에 까지 퍼져 있는 암흑을 보지 못했읍니다. 가장 먼저 인식했어야 할 그 암흑을 나중에야 알아차리고 발버둥쳐 봤을 땐 나는 이미 좌초되어 있었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C!

인생은 이론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대가 그다지도 강조하던 그것이 이제 나의 눈앞에 까지 닥쳐왔읍니다. 진리는 저 미지의 산골짜기, 커다란 바위에 눌려 간신히 자라고 있을 이름 모를 풀과 같이 외롭습니다. 억압을 받고 있는 진리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을 결심하고 나는 고독의 길로 나섰던 것입니다. 아무도 따라와 주지 않는 진리를 찾으러 나선 길. 그 때 황금같이 찬란하게 빛나던 형이상학의 세계, 아니 지금도 역시 다다를 길 없는 저 하늘에서 빛나고 있읍니다. 그 사랑하는 나의 神 앞에서 귀 먹고 눈 멀은 나는 神을 찬양할 송가를 불러야만 했읍니다. 나는 고독해 지기를 바랐고 정신은 고뇌로 가득 차기를, 그리하여 언젠가는 환희로 뒤덮일 날을 기대했읍니다. 인생은 버려진 헌 신짝처럼 밟혀지고 인간은 동물이 되었다 神이 되었다 나는 사상의 홍수 속을 헤매고 있었읍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부르짖었어요. “언젠가는 진리가 발견되리라. 자신은 속일 수 있지만 진실을 속일 자는 없다” 그러나 회의에 잠길 때도 있었읍니다. 인간에 의하여 파악되는 진리는 거짓말이다. 고로 일생은 궤변 속의 삶이다. 허나 나는 나의 행동에 자위를 할 때도 있었읍니다. 번갯불과 천둥이 수차례 머리를 때렸읍니다. 그 때마다 나의 정신은 재탄생하는 것 같았고 새로운 인식에 얼마나 가슴 흐뭇해 했던가요.

 

그러나 사랑하는 C!

그대는 이해할 것입니다. 흐뭇함 속에 감춰진 고통과 비애를. 또한 나는 나의 인식이 선명한 지식의 체계가 되지 않기를 바랐읍니다. 세계의 비밀을 밝혀 주고는 단지 사라져 버리기를 기구했읍니다. 아, 그러나 하늘을 바라는 나의 정신은 어떠한 양식에도 만족할 수 없었읍니다. 한 모금의 물을 마시면 더욱 더 갈증을 느꼈읍니다. 그득하게 가슴을 채우는 포만의 기쁨은 어디서고 구할 수 없었읍니다. 세계의 부조리성이 간간이 떠오르고 모든 것은 파라독스라는 사실을 느꼈을 땐 체념의 상태에 까지 들어갔었지요. 인식과 존재의 문제는 일보 후퇴하고 인생의 쓰라림이 피부로 느껴오기 시작했읍니다. 순수, 이성 등 사랑했던 단어들은 점점 멀어졌읍니다. 강요하듯 달려드는 그것은 책에서 손을 떼게 하고 멍하니 나의 가슴은 텅 비고 권태 속으로 빠져 들게 하였읍니다. 로깡땡의 의식이 밀착해 오는 것만 같았읍니다. 그러나 나의 초라한 의식에 얼마나 짜증을 내었으며 위대함을 바라는 무의식에 또한 얼마나 불쾌감을 느꼈던 것인가요. 그것은 또한 자신의 문제로 방황하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땅 속으로 침몰해 버렸으면, 대기 속으로 증발해 버렸으면, 이 악순환의 아이러니에 진저리가 났읍니다. 감각계로 들어오는 현상들보다도 내 내부 세계에 더욱 구역질이 났읍니다. 이제 외계는 정착된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이때까지의 나의 의식은 자력에 끌리듯 흔들리기 시작했읍니다. 나는 다시 두려워 집니다.

 

나의 마음을 이해하여 주는 사랑하는 C!

그대는 훌륭한 길을 걸어갑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렇게 납득시키고 있으니까요. 자존 당위성을 발견하려는 나의 노력이 헛되게 끝나고 말 것인지, 눈을 감으면 무섭게 몰아치는 겨울의 돌풍이 가슴을 얼게 합니다. 저 진리를 향하려는 욕망으로 활활 불타던 나의 가슴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C!

그대의 눈을 들어서 어두워진 하늘을 보십시요. 거기에서 그대가 사랑하고 있는, 추위에 떨 듯 홀로 반짝이고 있을 별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매서운 추위라도 그 빛을 끄지는 못합니다. 먹구름이 에워싸도 별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별을 그릴 줄 아는 외로운 사람이 되고 싶읍니다.

 

‘나는 기도드리고 싶다

온 별들 가운데 하나만은

정말 아직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아는 것만 같다

어느 별이 홀로 지속해 왔는가를-‘

 

사랑하는 C!

그대는 나에게 청춘의 정열을 가르쳐 줍니다.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드높은 용기를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그대는 또한 어떠한 운명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은 관용성을 갖고 계십니다. 황혼의 세계에서 삶의 조락을 느끼며 새벽의 이슬을 통하여 생명의 신비를 느낄 줄 아는 그대는.

 

사랑하는 C!

당신만이 나의 가슴에 다시 정열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그대의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을 배우고 싶습니다. 나는 결코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理性은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의식은 혼미할 지라도 그러나 나는 삶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나의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고뇌가 있고 고독이 있는 길로 다시 들어서렵니다. 티끌만도 못한 존재가 자아 부정을 하며 생의 문제로 고민할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철저히 나 자신이며 전혀 객관적 판단의 밖에 위치하고 있읍니다.

 

사랑하는 C!

그대는 그대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대의 이상은 또한 나의 이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C!

떠오를 태양을 기다립시다. 어느 이름 모를 호숫가에도 용이 되기 위하여 고통스럽게 자신을 성숙시키고 있을 뱀이, 알려지지 않은 뱀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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