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비가 떠나가는 가을을 재촉한다. 지난밤의 차가운 비바람에 나무는 더욱 홀쭉해졌다. 성하(盛夏)의 계절을 장식하던 나뭇잎은 생명의 물기가 빠지고 바닥에 떨어져서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날린다. 제 역할을 다하고 나면 해체되고 소멸하는 것이 생명체의 숙명이다. 인간 역시 유전하는 만물의 흐름 속에서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진다. 가을 끝자락 풍경을 보면 울적해진다.
'울적(鬱寂)'은 사랑스러운 말이다. 사전에는 '쓸쓸하고 답답한 마음'이라고 나와 있지만, 나는 '우울한 적요(寂寥)'라고 해석한다. 즉, '우울과 함께 하는 고요/평화'다. 세상사의 덧없음을 비관하면서 동시에 긍정한다. '울적'이라는 말에는 단순한 감정으로서의 우울을 넘어서는 깊은 울림이 있다.
가을에는 어쩔 수 없이 죽은 사람들이 자주 생각난다. 가까이는 아버지와 외할머니부터 한두 세대 앞의 친척과 지인들이다. 그들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짧은 추억과 함께 명멸하듯 지나간다. 모든 추억은 변색하고 왜곡되어 과거를 사실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단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흐릿한 영상일 뿐이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에 놀란다.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셨는지, 아버지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하나도 알지 못한다. 가까이 지냈을 게 분명한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다. 불과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이다.
살아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만나서 웃고 떠들지만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기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데 타인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할까. 알지도 못하면서 과연 공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우리는 서로 다가갈 수 없는 고독한 섬이다. 늘 갈증에 시달리는 외로운 존재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쓸쓸하고 가련한 존재다. 세계 자체의 무의미성에서 오는 쓸쓸함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위안을 찾으려는 인간의 헛된 노고에서 오는 가련함이다. 인간은 그것이 죽음의 길인지도 모르고 무지막지하게 불로 달려드는 부나방과 비슷한지 모른다. 인간에게서 돈, 명예, 예술, 종교, 가족, 친구 등의 겉옷을 벗겨내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생존의 힘든 싸움과 막무가내의 번식 본능, 그 너머에는 황량한 폐허밖에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할 수 있느냐이다. 외면하기 때문에 불안해진다. 정면으로 바라보면 두렵지 않다. 오직 바로 볼 수 있는 자에게서만 시시포스의 용기를 기대할 수 있다. 절망하지 않는 인간의 위대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값싼 위안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이다.
창 밖에는 잎을 모두 떠나보낸 은행나무가 찬 비에 젖고 있다. 나는 가련한 생명붙이로서의 동병상련에 젖는다. 그렇게 한동안 울적한 기분에 잠겨 있다. 비를 뿌리는 바람이 거센 늦가을의 어느 날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