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당연한 일은 없다

샌. 2022. 10. 19. 10:15

기억할 때마다 낯 부끄러워지는 옛날 일이 하나 있다. 외할머니가 살림을 맡으시고 동생과 함께 서울에 살 때였다. 부모님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며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주셨다.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은공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날은 왠지 심사가 삐딱했었던 것 같다. 나는 불쑥 내뱉고 말았다.

"자식 위해 고생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당연한 일 가지고."

아차, 싶었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었다.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셨다. 그렇다면 저 놈이 내 고마움도 모를 터가 분명하다는 표정이었다. 외할머니가 이 말을 부모님한테 전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부모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당연하다'는 말은 내 금기어가 되었다. 어쩌다 습관적으로 쓰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뜨끔해진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등의 계절 변화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적도 지방에서는 일 년 내내 여름만 나타난다. 모두가 자연계의 절묘한 균형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인간의 욕망이 자연 변화를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는지 보면 안다. 자연이 이럴진대 인간이 하는 행위에서 당연한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은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이 주는 선물을 당연하다고 여기면 자연에 대한 고마움이 생기지 않는다. 부모님의 희생을 당연하다고 여기는데 어찌 고마워할 수 있겠는가. 선생님이 가르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도 마찬가지다. 또한 자식이 잘 자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부모라면 자식을 따스히 보듬을 수 없다.

 

고마운 것을 고마운 줄 아는 마음이 염치(廉恥)가 아닐까. 세상에는 미숙했던 고등학생 때의 나처럼 염치가 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지금의 나는 염치가 있다고 자신하지도 못하겠다. 염치는 성숙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다. 질기다 여기는 인연일 수록 이 사실을 잊기 쉽다. 그러고 보니 인생 현자들의 가르침에서는 무엇을 당연시하는 언명이 없다. 그것은 꼰대들의 언어일 뿐이다. 고마운 것을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다.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을 낭비한 죄  (0) 2022.11.21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0) 2022.10.30
200일 & 50일  (0) 2022.09.25
기대 없음의 행복  (0) 2022.09.21
두 가지를 경계한다  (0) 2022.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