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샌. 2022. 10. 30. 18:47

존경하는 벗인 Y형은 글을 잘 쓴다. 잘 쓴다는 것은 기교가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글이 진솔하면서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형은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도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담백한 그런 점이 옆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 공통점도 많다. 가까워진 것도 꽃이 매개가 되어서였다.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가 "어, 나도 그런데"라는 반응이 나온다.

 

얼마 전에 통화를 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함을 잃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다. 외부 환경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황폐해져 버린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형은 "이만큼 살아보니 인생사가 새옹지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니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형이 최근에 쓴 글 한 편을 보내줬다.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에 관한 것이다. 형의 삶과 고민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기에 나에게는 감동적으로 전해졌다. 형의 허락을 받고 여기에 올리면서 나의 마음으로도 삼고자 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머리털은 하얗게 셌지만 두뇌는 아직 많이 녹슬지 않았으니,

맨눈으로 자잘한 글씨는 볼 수 없지만 안경의 도움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음은,

단풍 든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볼 수 있음은, 높고 푸른 구만리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 볼 수 있음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볼 수 있음은, 사랑스런 손주들 뛰노는 모습 볼 수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젊은 시절 이명(耳鳴)으로 밤잠을 못 이루었지만 이렇듯 지금까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음은,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을 들을 수 있음은, 손주가 들려주는 가야금 소리 들을 수 있음은, 강릉 안목해변 파도소리 들을 수 있음은,

이마에 주름살은 깊어지고 있지만 마음의 주름살은 아직 깊어지지 않음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의 시를 읽을 때 여전히 가슴이 뛰는 순수한 감성이 남아있음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브릿지 임플란트 치아 하나 둘 늘어나지만 생밤 땅콩 깨물어 먹을 수 있음은,

코끝을 스치는 커피향 라일락꽃 향기를 느낄 수 있음은, 수 만 개 미뢰 맛봉오리 미각세포 아직 스러지지 않아 한 끼 밥이 꿀맛 같음은,

도전하고 개척하는 청년의 마음 아직 조금은 남아있음은, 세상만사 잊어버리고 왁자지껄 담소화락할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약한 허리 근육통으로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다시 일어나 마음껏 걸어다닐 수 있음은,

젊은 시절 소화불량으로 고통스런 날을 보냈지만 지금껏 아밀라아제 펩신 트립신 리파아제 가스트린 세크레틴 잘 분비되고 있음은,

이렇게 손가락 놀려 이 글을 쓸 수 있음은, 마음 가는 곳 발걸음 옮길 수 있음은, 뛰고 달릴 수 있음은, 테니스를 할 수 있음은, 수영을 할 수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분필가루 미세먼지로 멍든 기관지 섬모들 허파꽈리들 봄 새싹 돋듯 다시 피어나 마음껏 숨 들이마셔 볼 수 있음은,

말없이 내 몸을 지켜주는 킬러세포 면역세포들 내 몸 구석구석 퍼져 활력 넘치게 함은,

티록신 인슐린 글루카곤 아드레날린 안드로겐 멜라토닌 세로토닌 항이뇨호르몬 잘 분비되고 있음은, 교감신경 부교감신경 길항작용 잘 하고 있음은,

 

어찌 그 감춰진 고마움 잊으리오!

 

들풀에서 행복을 줍고 그 행복과 감사를 나누며 살아가는 이웃이 있음은, 택아 하고 불러주는 어른들이 있음은,

잘 있노라고 잘 있느냐고 가끔씩 소식 전해주는 벗이 있음은, 마음 나눌 수 있는 젊음의 벗이 있음은, 내 마음의 글을 읽어주면 공감해 주는 글벗들이 있음은,

소요유(逍遙遊), 소소한 이야기 나누며 함께 걸어가는 벗이 있음은, 흘러가버린 젊은 날 함께 했던 추억의 샘물 나눌 수 있는 벗들이 있음은,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가족이 있음은, 함박웃음 한아름 안겨주는 손주가 있음은,

힘들고 고달픈 세상살이 푸념 늘어놓을 수 있는 아우들이 있음은,

갓 캔 도라지 갓 딴 호랑이콩 실어 보내주는 누부가 있음은, 누부야와 유년 시절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음은,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소풍길 같은 우리 인생

봄꿈 같은 우리네 인생

아침 안개 같은 백년 인생

 

말동무 되어주는 나무와 풀꽃과 산새들 늘 내 곁에 있음은,

 

주어진 삶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무거운 짐 홀로 지고가다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두 손 내밀어 주며 나를 도와주시는 그분이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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