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기대 없음의 행복

샌. 2022. 9. 21. 09:30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대로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다중(多衆)보다는 고독이라고 되새김질하는 자체가 이미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DNA에는 무리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도록 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원시시대에는 야생 상태에서 혼자 떨어져 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홀로 있으면 스트레스가 작동하도록 하는 명령어에 불이 켜지는 것은 당연했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할 때 기본적으로 기쁨을 느낀다. 야생의 위험이 사라진 지금도 인간은 소속감을 통해 안전과 위안을 받는다. 늙어서도 친구가 제일 중요하다고 주구장창 읊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좋은 인간관계는 행복의 원천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세상살이의 갈등이 어디서 오는지 조금만 돌아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사람만큼 복잡하고 미묘한 존재도 없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마음을 기울이고 애를 써도 가까워지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노력도 안 하고 베푸는 것도 없는데 다가오기도 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괴롭고, 싫어하는 사람은 만나게 되어 괴롭다." 부처님 말씀대로 인생의 괴로움 중 첫째가 인간관계에서 유래한다. 나와 주파수가 같은 사람과만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생고해(人生苦海) 중 사람한테서 받는 스트레스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괴로움의 바탕에는 기대심이 자리잡고 있다. 기대와 실망은 정비례한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부부 사이에 이놈의 기대 때문에 여러 사단이 생긴다. 내 주변에서도 부모의 과한 기대로 자식의 성격이 비뚤어지고 잘못되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기대에는 기본적으로 이기심이 깔려 있는 것 같다. 나의 바람을 상대가 충족시켜 주기는 원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기대는 대체로 실망과 원망으로 바뀐다.

 

기대나 바람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어떤 경우에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잃을 것이다. 진보란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을 때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한테는 대체로 금기사항이다. 사람은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믿을 바가 못 된다(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에 의하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기대는 상대를 향한 내 소망일 뿐이지, 상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다. 그저 스쳐가기만 할 뿐인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에게 감정을 낭비하는 것만큼 허망할 일도 없다.

 

기대치만 낮추어도 인간관계가 조금은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기대하지 말자, 비교하지 말자' - 이 두 가지가 행복의 실제적 조건이 아닐까(더 정확히 말하자면 덜 기대하고 덜 비교하기). 최근 몇 년 사이에 한 친구에 대한 실망감으로 씁쓰레한 감정이 지속되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내 마음속에는 이 친구에 대한 과거의 인상과 기대가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내가 상상하고 바라는 모습을 실제 친구인 양 오해하고 있었다. 혼자서 허깨비를 만들며 속을 끓이고 있다니 얼마나 바보인가. 

 

또한 타인만큼은 아닐지라도 자신에 대한 기대도 낮추는 게 좋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한테는 나르시스적 경향이 있다. 자신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반대로 과소평가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다수는 아니다. 옛날과 달리 이런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어 있으며 이젠 만나기도 힘들다. 허약한 내면에 가식과 과대포장으로 겉을 장식한들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자신에 실망했다고 가슴을 치기 전에 냉철하게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이 재미있고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내려놓는 게 좋다.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그냥 사니까 사는 것이다. 그게 부담 없고 마음 편하다. 더구나 사람에 대한 기대는 애시당초 품지 말자. 그래야 "네가 그럴 수 있니?"라는 헛소리는 안 하게 된다. 기대 없이 산다고 절대로 무미건조하지 않다. 실망을 덜 하기 위해서 기대를 하지 말자는 소극적인 단순 논리가 아니다. 과연 세상의 존재들이 기대하고 의지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기대 없음의 행복'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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