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죽음의 과정은 삶의 과정과 직결되어 있었다. 즉 엄마가 평생 살아온 과정과 방식이 죽어가는 과정과 방식을 결정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평생 늘 해오신 말들을 했고 늘 해오신 걱정들을 했으며 늘상 눈을 주곤 했던 대상들에 눈을 주셨다. 엄마 평생의 사랑의 방식은 죽어가는 과정에도 관철되었다. 나는 이 점을 감동적으로 지켜봤다."
박희병 선생이 어머니의 마지막 1년을 옆에서 간병하며 지켜본 끝에 내린 결론이다. <엄마의 마지막 말들>의 에필로그에 적혀 있다. 선생의 어머니는 말기암과 알츠하이머성 인지장애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태도가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생로병사는 생명체의 숙명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살아 있을 때부터 인식한다. 다른 동물은 현재만 살뿐 죽음을 예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필사(必死)의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생과 사의 의미를 찾기 위한 분투가 따른다. 거기에서 철학과 종교, 예술이 탄생한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미래에 드리운 막다른 절벽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면서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고뇌한다.
선생의 말대로 과연 산 대로 죽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고 본다. 착하게 살았다고 해서 평온한 죽음을 맞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짓궂은 주사위 놀이를 즐기기 때문이다. 사고와 같은 돌연사는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또는 못된 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닥치는지 원망하는 소리는 어디에나 있다. 착하게 살았지만 인생의 말년에 험한 꼴을 보이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반면에 나쁜 짓을 한 놈은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인과응보 없이 가기도 한다. 세상사는 산 대로 죽는다는 말에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인지장애/치매에 걸리면 한 인간의 부정적 속성이 드러난다.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나 애착이 깨진 의식의 껍질을 뚫고 튀어나온다. 치매 환자의 행동을 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인다고 한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목사가 있었다. 이분이 은퇴한 후 치매에 걸리더니 만나는 사람에게 욕설을 하고 심지어는 예수까지 사기꾼이라고 비방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평소 거룩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어느 쪽이 그의 진실된 모습이었을까, 산 대로 죽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위선자였을지 모른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착한 치매도 있다. 치매 환자지만 자신보다 남에 대한 배려심이 앞서는 드문 경우다. 책에서 만난 선생 어머니의 경우가 그러했다. 선생은 이를 평소의 마음씀이나 삶의 방식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잠재의식에 울분이나 화가 쌓여 있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치매에 걸리더라도 품위 있는 죽음이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 물론 가족이나 의료진의 따스한 보살핌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은 과연 산 대로 죽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벽에 똥칠을 할 정도로 망가지면 어디서 인간의 품위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산 대로 죽는다는 말도 적당한 때에 갈 수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존경하는 니어링 선생은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온 걸 감지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생의 끝자락에 할 수 있는 선택과 결단 역시 '산 대로 죽는다는' 하나의 표징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