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진첩 / 쉼보르스카

샌. 2021. 12. 1. 10:46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프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야전병원의 들것 위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무도회가 끝난 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무스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조차도

네가 아닌 댄스 파트너를 쫓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은판 사진이 탄생하기 전,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그 누군가라면 모를까.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죽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이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 사진첩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중학교 동기 중에 K가 있었다. 3학년일 때 같은 반이었는데 과묵하고 성실하면서 공부밖에 모르는 친구였다. 반의 까불이들을 나무랄 때 담임 선생님은 늘 K처럼 묵직하게 처신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한 번은 수업 시간 중에 갑자기 K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한 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우리는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정신이 이상하게 된 거라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K는 서울에 있는 S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서로 다른 학교로 갈라지면서 우리는 연락이 끊어졌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전화가 없던 당시는 어떻게 지내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K의 소식을 들은 것은 한 해가 지나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자살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전언이었다.

 

자살한 이유는 한 여학생을 너무 좋아해서였다고 해서 한 번 더 놀랐다. S고등학교는 드물게도 남녀공학인 학교였다. 자취를 하던 K는 등하교를 하면서 어느 여학생을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작은 관심에서 시작했겠지만 나중에는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하루라도 얼굴을 보지 못하면 열병을 앓을 정도였다. 교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K를 다른 아이들은 이상하게 바라봤다고 한다. 그렇다고 K의 성격상 그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그렇게 폭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K의 일기장을 통해 드러났다. 한 여학생을 짝사랑하다가 사모하는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K는 몸을 던졌다. 외골수로 나아가던 K는 한순간에 뚝 부러졌다.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시인은 이렇게 선언한다. 아니다,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분명히 있었다. 지금도 사랑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란 어떤 곳일까. 그 황폐한 풍경 속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버텨 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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