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소원수리 / 권순진

샌. 2021. 12. 14. 15:17

내 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오밤중 담 너머로 쌀 가마니 세 개를 넘기라는 선임하사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고부터다 불의에 수발을 들기 싫어서가 아니라 간이 작아서다 그 일을 보조하기 위해 방위 둘을 대기시키라는 지시도 듣지 않았다 우리 부대는 후방 헌병대였고 쌀은 남아돌았다 수감자들에겐 정량이 제공되지 않았으며 헌병들은 외식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음날 워커발로 조인트를 여러 차례 까였다 동료 사병들도 내가 포크 창에 찍힌 노란 단무지 같은 신세인 걸 다 알고 있다 그들의 비겁 위에 물구나무 선 연민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찍힌 건 나 말고도 더 있다 소원수리 때 '황소무사통과탕'에 대한 진실을 까발렸다가 필적감정으로 들통 난 K상병이다 나도 종이 앞에서 딸막딸막한 적은 있으나 다른 병사처럼 '현재 생활 만족' '불만사항 제로'였다 제대를 하고난 이후에도 늘 그런 식이다 어디 시원하게 답답함을 풀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았다 이미 대책이 서지 않는 생이다

 

- 소원수리 / 권순진

 

 

훈련이 끝에 다다랐을 때 소원수리란 걸 썼다. 그 시간이 다가오자 훈련소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다. 우리는 넓은 강당에 줄을 맞춰 앉았다. 비밀은 보장한다, 불만이나 억울한 일이 있으면 사실대로 써라, 그래야 병영 문화가 개선된다, 단상에 선 장교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훈병들 사이에서는 이미 쓸데없는 짓이란 게 사발통문식으로 돌고 있었다.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썼다가는 나중에 다 알게 되어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협박조의 소문도 퍼졌다.

 

훈병이 군대 내 비리까지 알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훈련소의 열악한 시설이나 억울한 기합, 또는 상사로부터 받는 인간적 모멸감에 대한 토로였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하사한테 신나게 얻어터지고 한나절 동안 화장실 청소를 하는 벌을 받았다. 왜 그렇게 시범 케이스로 걸렸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내 행동이 삐딱해서 그 녀석 기분이 나빴을 수 있다. 그날은 국군의 날이어서 특식이 나오고 전부 쉬는데 혼자서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똥지게를 졌다. 저녁에 내무반의 옆자리 동료가 매점에서 빵을 사주며 위로했다. "군대 X같애." 종이 위에 하사 녀석의 얼굴이 어른거렸으나 딸막딸막하기만 했고, 나 역시 '불만사항 제로'였다.

 

소원수리(訴願受理)는 말 그대로 풀이하면 '하소연하고 바라는 바를 접수해서 처리한다'는 뜻이다. 어느 분 말을 들으니 요즈음 군대에는 민원 때문에 병사들 통솔하기가 너무 힘들다 한다. 그래서 일찍 제대하는 직업 군인이 증가한다는 소문도 있다. 교실 붕괴로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명퇴하는 교사가 생기는 현상과 같다. 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그랬었다. 이런 애들이 군대 가면 군기가 잡힐지 몰라. 민원이 무서워 제대로 된 훈련도 못 시킨다니, 당나라 군대 걱정이 남의 일이 아니다. 형식적이었지만 그래도 들어주는 척이라고 했던 소원수리도 이젠 옛말이 되어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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