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람을 쬐다 / 유홍준

샌. 2021. 12. 5. 11:57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바닥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 사람을 쬐다 / 유홍준

 

 

밤골에서 살 때 비어 있던 옆집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이 찾지도 않았다. 어떤 사연으로 산골로 들어왔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동네 가운데 살지만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흘려듣는 말로는 사업이 망하고 가족과도 단절되어 떠돌아다니다가 이 마을에 들어왔다는 정도였다.

 

할아버지의 - 할아버지래야 나보다 대여섯 살 많았겠지만 - 유일한 외출은 토토복권을 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읍내에 나가는 것이었다. 다른 날은 주구장창 스포츠 채널 방송만 봤다. 어쩌다 할아버지와 마주쳐서 얘기를 나눌 때면 화제는 온통 배구 경기에 관한 것뿐이었다. 다른 화제를 꺼낼 틈새를 아예 주지 않았다. 그다지도 심하게 한 가지에 몰두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이 시를 읽다 보니 그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할아버지는 사람을 쬐지 못한 반작용으로 스포츠 경기의 결과를 맞추는데 몰두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외로웠다는 반증일 수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할아버지의 배구 얘기를 더 들어주고, 가끔 집에 초대도 하면서, 내가 햇볕이 되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때는 내 코가 석 자였던 시기라 옆집에 이상한 할아버지가 산다고 구시렁대기만 했다.

 

반면에 너무 사람을 쬐게 되어 생기는 부작용도 있다. 햇볕을 너무 쬐면 피부암이 생기듯이 말이다. 현대인은 너무 다중(多衆) 속에 노출되어 오히려 외롭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신을 성찰하는 고독한 시간을 갖지 못한 탓이다. 젊어서는 너무 쬐고, 늙어서는 쬐지 못해 고통 받는 삶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둘의 상관관계를 잘 살피면서 지혜롭게 처신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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