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북녘 거처 / 안상학

샌. 2021. 11. 15. 10:52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내가 살아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준 라면 한 끼 훌쩍이던 식탁

누이동생이 그토록 다니고 싶어 한 학교를 자퇴한 소년

상계동 종점 창이 없는 그 집 열일곱 한 달

그 어느 하루로라도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지하철 4호선 종점 당고개역 솟은 그 너머

아배 편지 한 장 받아들고 눈물 찍으며 돌아섰던

이제는 의지가지없는 그 곳

불알친구는 십 년 뒤 낙향하여 낙동강에 목숨을 흘려보냈고

편지 한 장으로 나를 불러 내렸던 아배도 오래 전 소식 없고

식모 살던 동생도 다른 하늘을 이고 산 지 오래

열일곱 소년만 꼬박꼬박 혼자서만 나이 먹어가며

이 낡은 남녘에서

다 늦어 또다시 가출을 감행할 꿈을 꾸며

그 북녘을 떠올려 봅니다만, 벌써부터 야외전축도 없고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 레코드판도 없어진 지 오랩니다만,

갈 수만 있다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내 삶의 가장 먼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

당신은 인생길 어디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없습니까

있다면 남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남녘입니까

미안한 일인지 어떤지 나는 아직 그 북녘입니다만,

당신, 당신들은 지금 어느 녘에 있습니까

 

- 북녘 거처 / 안상학

 

 

올해 백석문학상은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의 안상학 시인이 받았다. 수상 시집 안에 실려 있는 이 시는 열일곱 소년의 추웠던 '북녘 거처'의 한 때를 보여준다. 짧은 과거의 단편과 연결되는 시인의 현재 지향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시인에게 아픈 과거는 지우고 싶은 상처가 아니라 고이 보듬고 나아가야 할 흔적인가 보다.

 

내 열일곱은 주변을 돌아보지도 못하게 철이 없었다. 동네 불알친구가 요꼬 기계 앞에서 졸린 눈 비비고, 이문시장 신발 가게 지청구 받는 점원 일을 할 때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못했다. 내 교복 입은 모습을 얼마나 부러워했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러면서 따스한 남녘만 바라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시인의 마지막 말에 뜨끔 자책이 든다.

 

"당신은 인생길 어디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없습니까

있다면 남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남녘입니까

미안한 일인지 어떤지 나는 아직 그 북녘입니다만,

당신, 당신들은 지금 어느 녘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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