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혼자만 착하믄 뭐하노 / 박제영

샌. 2021. 10. 24. 14:51

착하다 사람 좋다

그기 다 욕인기라

사람 알로 보고 하는 말인 기라

겉으로는 사람 좋다 착하다 하믄서

속으로는 저 축구(芻狗) 저 등신 그러는 거다

우리 강생이 등신이 뭔 줄 아나

제사 때 쓰고 버리는 짚강생이가 바로 등신인 기라

사람 축에도 못 끼고 귀신 축에도 못 끼는

니 할배가 그런 등신이었니라

천하제일로 착한 등신이었니라

세상에 두억시니가 천지삐까린데

지 혼자 착하믄 뭐하노

니는 그리 물러 터지면 안 되니라

사람 구실을 하려믄 자고로 모질고 독해야 하니라

길게 말할 게 뭐 있노

우리 강생이 그저 할배랑 반대로만 살면 되니라

하모 그라믄 되니라!

 

- 혼자만 착하믄 뭐하노 / 박제영

 

 

착한 남편과 사느라 할매는 무지 고생을 했는가 보다. 손주를 앞에 두고 착하게만 살면 안 된다고 간절하게 당부한다. 정말 그렇다. 세상에는 두억시니가 천지삐까린데 혼자만 착하믄 뭐할끼고, 두억시니들한테 이용만 당하고 살 게 뻔하다. 그런 점에서 착하다는 말은 우매하거나 멍청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은 대선 시즌이다. 대권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의 현란한 말들이 난무한다. 어떤 경우에는 말이라기보다 개소리와 다를 바 없는 것도 있다. 그걸 좋다고 손뼉 치는 우매한 백성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착하다는 것은 전제가 하나 있다. 선인(善人)은 세상의 이치를 바로 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선한 작용을 할 수가 없다. 불의에는 당당하게 분노할 수 있어야 진정한 착한 사람이다.

 

할매가 말하는 '추구(芻狗)'는 옛날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 쓰는 풀이나 짚으로 만든 강아지였다. 그 이전에는 실제 개를 잡아 제물로 올렸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추구로 바뀌었을 것이다. 제사가 끝나고 길에 버린 추구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하찮은 물건이다. 등신(等身)도 비슷한 의미다. 

 

노자 <도덕경> 5장에도 '추구'가 나온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천지는 인자하지 않아, 만물을 풀강아지로 여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아, 백성을 풀강아지로 여긴다.

 

천지나 성인이 불인(不仁)하다거나, 만물이나 백성을 추구로 여긴다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보편적인 사랑을 뜻하기 위해 쓰인 비유다. 편애하는 마음이 아닌 무심(無心)이라야 만물을 품을 수 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손주를 아끼는 할매의 마음이 간곡하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녘 거처 / 안상학  (1) 2021.11.15
낙엽 / 복효근  (0) 2021.10.30
뽑기 해 먹기 / 김창완  (0) 2021.10.14
겨울 산 / 황지우  (0) 2021.10.04
내가 몰랐던 일 / 이동순  (0) 2021.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