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내가 몰랐던 일 / 이동순

샌. 2021. 9. 25. 11:47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저녁밥을 기다리던

수백 개의 거미줄이 나도 모르게 부서졌고

때마침 오솔길을 횡단해가던

작은 개미와

메뚜기 투구벌레의 어린 것들은

내 구둣발 밑에서 죽어갔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방금 지나간 두더지의 땅속 길을 무너뜨려

새끼 두더지로 하여금

방향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고

사람이 낸 길을 초록으로 다시 쓸어 덮으려는

저 잔가지들의 애타는 손짓을

일없이 꺾어서 무자비하게 부러뜨렸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풀잎 대궁에 매달려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영롱한 이슬방울의 고고함을

발로 차서 덧없이 떨어뜨리고

산길 한복판에 온몸을 낮게 엎드려

고단한 날개를 말리우던 잠자리의 사색을 깨워서

먼 공중으로 쫓아버렸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처럼 나도 모르게 저지른 불상사는

얼마도 많이도 있었나

생각해 보면 한 가지의 즐거움이란

반드시 남의 고통을 디디고서 얻어내는 것

이것도 모르고 나는 산 위에 올라서

마냥 철없이 좋아하기만 했었던 것이다

 

- 내가 몰랐던 일 / 이동순

 

 

뒷산을 가끔 올라간다. 워낙 다니는 사람이 없어 산길에는 거미들이 집을 많이 지어 놓고 있다. 그냥 걸어가다가는 얼굴과 옷에 거미줄이 잔뜩 묻는다. 그렇다고 일일이 피해 갈 수도 없어서 막대기 하나를 집어 휘두르면서 간다. 몇 시간을 정성들여 지었을 거미줄이 사정없이 부서진다. 때로는 앞에 거미가 있어도 죽든 말든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거미에게 못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행동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어찌 거미만이겠는가, 나도 모르게 고통을 준 생명이 얼마나 많으랴.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생각해 보면 한 가지의 즐거움이란

반드시 남의 고통을 디디고서 얻어내는 것"

 

어찌 산길을 걸을 때만이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원리가 그러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는 행복과 불행의 총량이 똑같다고 한다. 다른 이가 불행한 만큼 내가 행복하다. 내 즐거움은 타자의 눈물을 먹고 만들어진 것이다. 기운차게 걷는 내 발걸음을 돌아본다. 길을 걷지 아니할 수는 없다. 주변을 살피며 좀 더 조심스럽게 걸어가기, 마냥 철없이 좋아하지만 않기, 막무가내로 살지 않기, 고작 이런 다짐을 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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