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나의 해방일지

샌. 2022. 7. 9. 11:05

 

지인이 추천해줘서 다시보기로 닷새 동안 몰아서 본 드라마다. 16회분으로 올봄에 jtbc에서 방송되었다.

 

잘 만들었다기보다는 색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의 키워드는 '추앙'과 '환대'인데 이 단어들 자체가 낯설고 생경해서 드라마의 비현실적인 부분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미정과 구씨 관계는 끝까지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뭐, 애매한 것은 애매한 채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환대'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동화의 세계라면 가능하겠지만.

 

지지난주에 어느 모임에서 MZ세대의 의식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요사이 젊은이들의 고민과 삶을 알고 싶으면 '나의 해방일지'를 보라고 한 분이 말해줬다. 경기도 산본에 살면서 서울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삼남매의 애환과 꿈, 사랑이 잘 그려져 있다. 부모 세대와의 간극 묘사도 리얼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정의 직장 동료 네 사람이 결성한 '해방클럽'에 제일 관심이 갔다.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네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모여서 만들었지만, 자신을 성찰하면서 한 단계씩 성숙해 나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뭐에서 해방되는 거냐고 직장 상사가 놀리며 물어볼 때 미정은 냉정하게 대답한다. "인간한테서요. 지겨운 인간들한테서요." 결국 미정은 그 지겨운 인간들마저 환대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해방클럽의 강령이 재미있다.

 

1. 행복한 척하지 않는다.

2. 불행한 척하지 않는다.

3. 정직하게 보겠다.

 

미정보다는 기정의 솔직한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약간 푼수 같지만 무엇이든 마음에 담아두지를 못하는 솔직한 성격이다. 쉽게 낙담하지만 이내 희망을 발견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기정이 내성적인 태훈과 어떤 관계를 이어나갈지도 궁금했다.

 

'나의 해방일지'는 따스한 휴먼 드라마다. 차가운 현실에 시달리고 흔들리면서 인간다움을 버리지 않고 진정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청춘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너무 자본주의 물이 들었다고, 즉물적이고 감각적이라는 젊은이에 대한 내 편견은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반짝이는 대사들이 자주 나온다. 보다가 꽂히는 대사가 나오면 수첩에 받아 적었다.

 

"하고많은 동네 중에 하필 계란 흰자위에 태어나서, 서울에서 살았다면 달랐을까?"

"내성적인 사람은 내성적일 수 있게 내버려두면 안 되나?"

"말로 사람 시선 끄는 데 재미 붙이면 막차 탄 거야."

"날 추앙해요!"

"집과 짝은 찾아가는 게 아니다. 때 되면 온다."

"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갇힌지도 모른 채 사는 여기서."

"다 무덤으로 가는 길인데 뭐 그렇게 신나고 좋을까."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사람들보다 망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정직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루에 괜찮은 시간이 한두 시간 되나? 나머지는 다 견디는 시간."

"뭐에서 해방되는 건데?" "인간한테서요. 지겨운 인간들한테서요."

"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아."

"어릴 때 난 궁금한 게 하나밖에 없었어. '난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사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을 묻어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혼자 있으면 차분하고 다정해져."

"연기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냐?"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은 하루에 5분 동안 설레기야."

"오십? 오십에 무슨 감정이 있을까? 그 나이 되면 그냥 동물이 아닐까 싶다. 살아 있으니까 사는."

"나 미쳤나 봐.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어."

 

마지막 미정의 대사가 오글거리긴 하지만 드라마는 해피 엔드로 끝난다. 내내 미소를 머금으며 본 젊은이들의 사랑스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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