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과학인문학

샌. 2022. 6. 13. 11:46

직장에 있을 때 후배 P가 있었다. 역사를 전공한 지적 호기심이 대단했던 후배였다. 수시로 나를 찾아와서 양자론에 대해 질문하는 통에 혼줄이 났다. 딴에는 물리를 공부했으니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도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면 말이 길어지고 어려운 용어를 쓸 수밖에 없다.

 

'시인과 함께 하는 물리학 산책'이라는 부제를 가진 <과학인문학>은 드물게 시인이 물리학에 관해 쓴 책이다. 시인이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지은이인 김병호 선생은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시인이 된 분이었다. 물리학의 소양에 문학의 감성이 더해져서 '과학인문학'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만들어졌다.

 

"문학과 과학은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며 그 호기심을 밀고 나가는 힘은 상상력이다. 다만 표현하는 논리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지은이의 말처럼 문학과 과학의 뿌리는 맞닿아 있다. 다만 열매의 맛이 다를 뿐이다. 교양인이라면 여러 맛을 맛볼 수 있어야 하지만 문학에 비해 물리학은 가까이 하기가 여의치 않다. 그런 면에서 지은이는 둘을 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인 것 같다.

 

책은 과학적 원리와 우리 삶의 이치를 연관시키며 흥미있게 풀어나간다. 예를 들면 블랙홀을 설명할 때는 인간의 죽음에 비유한다. 사건의 지평선이 바로 죽음의 순간에 해당한다. 사건의 지평선을 지난 다음 단계는 응당 사후생과 연관하여 바라볼 수 있다. 또 만유인력 공식에 나오는 중력상수 G를 '공간이라는 미끄럼틀의 경사를 알려주는 값'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재미있다. 시인의 눈으로 물리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새로웠다.

 

시인이 썼다고 책 수준을 가벼이 봐서는 안 된다. 현대물리학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없이는 인문학과 연관시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이번에 <과학인문학>을 읽으면서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는 기본 패러다임이 혁명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종래의 개념들로는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는데 한계가 있다. 입자, 파동, 에너지 같은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책에는 지은이가 물리학 원리에 기반하여 쓴 시도 여러 편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지은이는 과학이 밝혀낸 자연의 비밀스런 속내는 아름다움으로 꽉 차 있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시와 과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과학인문학>은 과학자들이 시를 읽고 시인들이 과학책을 가까이하는 아름다운 상상을 해 보는 책이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0) 2022.06.25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0) 2022.06.19
야생 속으로  (0) 2022.06.05
콰이어트  (0) 2022.05.29
나의 사적인 그림  (0) 202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