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연속으로 80세 넘은 작가의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나에게도 곧 다가올 80세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크다고 하겠다. 이 책은 미국의 SF 작가인 어슐러 르 귄이 말년에 쓴 에세이다. 인생의 막바지에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올린 글을 모은 책이다.
이 분은 블로그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블로그는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자기는 내향적인 사람이라 낯선 사람들과 댓글로 대화를 나누는 게 너무 이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든여섯에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마라구 작가를 보고 생각을 바꿔 블로그를 하게 되었다. 작가는 블로그 글쓰기의 장점으로 자유로움을 든다. 사마라구처럼 독자들과 소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 블로그 글쓰기다.
지난번 도널도 홀의 수필처럼 어슐러의 글에서도 노년의 지혜와 원숙함이 읽힌다. 두 분 모두 공통으로 유머와 재치를 갖고 있다. 인생의 성공은 부나 명성이 아니라 이런 내면의 성숙에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끝없이 공부하면서 자기완성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느꼈다.
글 중에서 '남자들의 단합, 여자들의 연대'라는 제목이 남녀의 특징을 잘 보여줘서 눈에 들어왔다. 남성의 단합이 권력 쟁탈의 과정에서 생긴 공격적이고 철저한 통제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반해, 여성의 연대는 상호 협력과 바람과 필요에 의해 파생된다. 남성적 기관들에 여성이 진출하면서 여성은 십중팔구 남성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남성적 가치를 강화하도록 강요 받는 점을 작가는 지적한다. 남성을 모방하지 않는 여성이 여성으로서 남성적 기관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심한다. 그래서 출세하는 여성들을 불안하게 지켜본다고 한다. 패미니즘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 모두 남성적 가치의 정의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특정 성에 배타적이기를 거부하며, 공격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와해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경제학자들이 경제의 목표로 성장을 끊임없이 주문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현재 시스템이라면 경제의 성장은 부자들만 더 부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통계를 보면 2000년에서 2007년 사이 호황기에 최상위 10%의 부유한 미국인들은 100% 소득 평균이 증가했다. 반면에 이하 90%의 미국인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불황이 덮치면 공황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 시스템을 극복하거나 빠져나오는 논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식물연민'이라는 제목의 글도 흥미롭다. 육식, 채식 논쟁을 넘어선 '유기체주의(Organism)'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지다. 우리는 고통받는 동물들을 염려하지만 식물의 고난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관심이 없는데 작가는 의아해 한다. 잔인한 위선을 피하고 양심의 투명성을 성취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오건(Ogan)'이 되는 길이라고 한다.
<남겨둘 시간이 없습니다>는 노년 삶의 기록이기보다 작가의 소신이나 사상이 드러난 글이 대부분이다. 양념으로 작가가 기르는 고양이 파드에 대한 얘기도 재미있다. 다만 번역이 서툴러 글의 맛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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