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그 겨울의 선물

샌. 2021. 12. 19. 13:45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통로에 서 있는 사람이 빽빽할 정도로 승객이 많았다. 다행히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내 맞은편에는 한 아가씨가 책에다 시선을 묻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나는 마주보기를 애써 피하며 창 밖만 내다봤다.

 

대학 1학년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가는 중이었다.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1년은 어영부영 지나갔다.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서 낙제한 과목은 방학 때 보충수업을 들어야 했다. 2학기를 마쳤을 때 세 개 과목인가가 성적 미달이 되어 윈터 스쿨을 듣고 늦게서야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기차는 원주역을 지나면서 한산해졌다. 셋씩 비좁게 앉았던 자리도 두 사람으로 줄어들며 여유로워졌다. 그제서야 앞에 앉은 아가씨와 말문을 트게 되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지만 계란 같은 군것질거리를 권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담한 체구에 선해 보이는 인상이 좋았다. 부모님이 계신 고향이 서로 멀지 않은 거리였고, 내리는 역도 같았다. 둘은 똑같이 고향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런 공통점이 처음 만난 사람 같지 않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대학 신입생 시절의 봄은 미팅이 붐을 이루었다. 끼가 있는 친구들은 벌써 열 몇 번째라고 자랑하며 부나비처럼 분주했다. 나는 두세 번 따라가 보았으나 영 미팅의 분위기가 맞지 않았다. 짝을 맞추고 데이트를 나가서 돌아다니는 코스는 뻔했다. 나는 파트너를 즐겁게 해 줄 능력이 없었고, 투자 대비 재미도 없었다. 세 번째였던가, 창경원 분수대에서 담배를 거꾸로 물고 기다리다가 퇴짜를 맞은 뒤로는 아예 외면했다.

 

앞에 앉은 그녀는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들과는 달랐다. 차분하고 조신했는데 특히 책을 읽고 있던 첫인상으로 더 끌렸다. 그 책은 작은 문고본이었는데 제목이 <데미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주로 고향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았고,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어색한 침묵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지 않았을까. 원주에서 두 시간여를 지나 기차는 목적지 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마치 연인이나 되는 양 나란히 내렸다. 곧 헤어져야 하는 게 아쉬웠다. 다방에 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말할 주변머리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수첩을 꺼내 주소와 이름을 쓰고 동네 약도를 그렸다. 그림에서 그녀의 집은 큰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었다. 찾아오는 길을 설명하고 꼭 한 번 놀러오라면서 수첩에서 찢은 쪽지를 건넸다. 지금은 서울에서 지내고 있지만 때가 되면 고향에 내려와 살 계획이라고 한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집에 와서 며칠이 흘렀다. 자주 쪽지를 꺼내보면서 그녀를 생각했지만 망설이기만 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한밤중에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순백으로 변해 있었다. 오늘이 그녀를 찾아갈 날이란 걸 나는 직감했다. 그녀가 있는 동네는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가야 했다. 내 손에는 예쁘게 포장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두 번째여서 그녀의 집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눈에 덮인 시골 마을은 오가는 사람이 없이 고요했다. 그녀의 집도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적적했다. 용감하게 걸어들어가 누구를 찾아왔노라고,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가는 온 동네가 깨어나서 나를 쳐다볼 것 같았다. 나는 멀리 떨어진 개천 둑길을 따라 오가며 집에서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에게 수없이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하얀 눈밭에 내가 찍는 발자국만 늘어갈 뿐이었다.

 

가까이에 소수서원이 있어서 다녀오기도 했다. 그래도 마을은 시간이 정지한 듯 여전했다. 아마 서너 시간을 오락가락했을까, 결국은 그녀를 찾아가지 못했다. 내 마음은 오만 가지 생각으로 뒤숭숭했다. 결과만 생각하면 헛걸음을 한 셈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읍에서 내려 하얀 도화지와 편지 봉투를 샀다. 문방구에서 나오며 오늘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예견했다. 세상은 포근하고 아련하고 따스했다. 50 년 전 그해 겨울이 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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