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김남주 평전

샌. 2024. 5. 24. 11:14

"나는 시인이 아니라 전사(戰士)여!"

김남주는 스스로 행동하는 전사가 되기를 택했고 그 길을 갔다. 총명했던 젊은이가 입신양명의 길을 마다하고 혁명의 대의를 따른 과정을 이 책을 통해 좇아가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자신의 신념을 올곧게 지켜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존경받을 만하지만 하물며 자기희생이 따르는 험난한 여정임에랴. 책 어딘가에는 김남주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자유를 향하여 전 존재를 내던진 자, 사적 소유로부터 멀찍이 벗어나 버린 자, 개인적 욕망을 아예 포기한 자."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일고에 들어간 김남주는 고등학생때부터 영어와 독어 원서를 읽을 정도로 어학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고, 많은 독서를 통해 사회와 역사의식에도 일찌감치 눈을 떴다. 그는 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 방식에 반발하여 고등학교를 자퇴한다. 이런 사고의 밑바탕에 깔린 계급의식은 그의 가정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김남주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 성실함을 알아본 주인이 한쪽 눈이 불구인 자신의 딸과 혼인을 시켰고 김남주는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분 차이가 큰 탓인지 결혼 생활은 원만치 않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친정으로 도망가는 일이 잦았고 어린 김남주는 어머니를 찾으러 가면서 외가에서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집을 생각하면'이라는 시에서 김남주는 그때를 이렇게 묘사한다.

 

터무니없이 넓은 이 집 마당이 못마땅했고

농사꾼 같지 않은 허여멀쑥한 이 집 사람들이 꺼려졌다

심지어 나는 우리 집에 없는 디딜방아가 싫었고

어머니와 함께 집에 돌아갈 때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이런저런 당부 말씀이 역겨웠다

 

보통의 아이라면 외갓집을 좋아하는데 김남주는 반대였다. 검정고시로 들어간 전남대에서도 유신 반대 투쟁으로 인해 제적 당하고 8개월간 복역한다. 그 뒤 고향에서 해남농민회를 조직하고 광주에서 인문 서점을 열어 민중문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김남주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고비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가입이었다. 돌멩이를 든 데모대로는 지배계급의 벽을 깰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남민전 전사라는 무장 투쟁의 길로 나선 것이다.

 

1979년에 활동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조직원과 함께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을 털려고 들어갔다가 실패한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 돌아보면 계획이 너무 엉성했고 어쩌면 소영웅주의에 빠져 있지 않았나,라는 느낌도 받는다. 얼마 뒤 남민전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체포되고 보안법 위반 등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시 대부분은 교도소에 복역하는 동안 비밀리에 써졌다.

 

그는 파농의 폭력론과 체 게바라의 거침없는 행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만인을 위해 싸울 때 나는 자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라는 신념으로 살았다. 9년을 복역하고 1988년에 가석방되었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1994년에 사망하였다. 향년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였다. 

 

<김남주 평전>을 통해 특이했던 한 인간을 만났다. 책의 부제는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이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용기를 가진 인물 앞에서 그저 방관자로만 살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지은이인 김형수 선생은 책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김남주의 생애에서 가장 크게 감동한 점은 그가 이웃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일상의 경쟁에서 언제나 '자발적 무능'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그를 추적한 형사조차도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묻게 만들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김남주 같은 정신들이 싸워서 지켜온 인간의 존엄성을 물려받아 지상의 가치들을 학대하거나 탕진하기 일쑤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김남주의 굽이굽이, 실로 설명하기 어려운 생의 기슭에서 거듭 '21세기의 인류는 타자 앞에서 무능하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동물들 앞에서도, 저 말없는 식물들 앞에서도 지금보다 훨씬 무능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누군가가 이 문명이 가져온 엄청난 손실을 감당할 내공을 기르지 않으면, 대지가 더는 인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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