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고 나니 어느 외국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한국의 시골 사람들은 오직 친척들에게 잘 하고 자식을 부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죽도록 일하는 것을 삶의 전부로 안다." 신경숙 작가가 그리는 아버지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의 미덕일 수도 있고,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의 한계일 수도 있다.
마침 정읍 깻다리 마을 출신의 지인이 있어서 신경숙 작가와 가정에 대해 짧게나마 들을 기회가 있었다. 소설에 묘사된 아버지가 얼마나 사실적인지 물었더니 미소로 대신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객관성을 따지는 것이 우문인지 모르겠다. 형제라도 부모에 대한 기억과 인상이 달라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의 후반부에도 작가 외에 다른 형제와 어머니가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실려 있다. 한 인간을 서술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소설은 작가가 고향에 혼자 계시는 아버지를 돌보면서 전에 없는 깊은 교감을 나눈다. 딸을 잃은 슬픔에 잠겨 여러 해 동안 작가는 고향을 찾지 못했다(작가가 표절 시비에 휘말린 고통을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작가의 아버지는 무척 다정다감하시고 재주도 많은 분이신 것 같다. 우리 세대가 경험한 일반적인 시골 아버지 상과는 다르다. 너무 미화하여 표현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특히 아버지와 큰오빠 사이의 신뢰와 애틋함은 - 서로 주고받은 편지에서 드러나는 - 부럽기 짝이 없다. 장남인 내 입장에서 볼 때 거의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 또한 형제 사이의 우애도 부럽다. 과거 농촌에서 이런 가정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6.25와 이념 갈등에 대한 분량도 상당하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박무릉이라는 은자는 신비감마저 준다. 하지만 이 세계를 대하는 관점이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서는 다소 미흡하다. 그저 착하고 성실한 것만으로는 아쉽기 때문이다. 너무 모범적인 사람들이 다수 등장하니 한쪽으로 기울어져 보여서다.
작가는 고향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아버지를 새롭게 이해함은 물론 마음의 치유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작가는 어디에선가 '삶에는 기습이 있다'라는 표현을 썼다. 살다 보면 어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지 모른다. 거의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불상사다. 이럴 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 유년의 추억이 담긴 고향과 가족이 아닌가 싶다.
소설 끝 부분에 작가가 마을을 산책하다가 할머니 셋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 보는 분들이었지만 할머니들은 작가를 다 안다는 듯 이렇게 위로한다.
"오래 슬퍼하지는 말어라잉."
"우리도 오래 헤맸고나."
"모두들 각자 그르케 헤매다가 가는 것이 이 세상인게."
오래전에 작가의 <외딴 방>을 읽고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20년도 더 전이라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 뒤에 <엄마를 부탁해>라는 베스트셀러가 나왔지만 읽어보지는 못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계기로 신 작가의 작품을 더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