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14

바보아재

유순하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소설'이라는 부제대로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다. 어떻게 죽느냐는 어떻게 사느냐와 연관된다. 그러므로 이 소설집은 죽음에 대한 진지한 사념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단편을 요약하면, 1) 바보아재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을 연상시킨다. 유치원생 정도의 지능이지만 착하고 순수한 바보아재와의 추억을 통해 영악해진 우리의 삶을 반성한다. 바보아재는 천수를 누리고 누구보다 많은 문상객의 조문을 받으며 세상을 뜬다. 2) 얼굴 하얀 그 사람 데레사 수녀가 세운 인도의 '임종의 집'에서 만난 한 한국인의 죽음을 그렸다. 아무 인적사항이 알려지지 않은 그는 자신이 평생 봉사한 '임종의 집'에서 쓸쓸히..

읽고본느낌 2018.09.15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나온 지 14년이 되어선지 최근에 나온 작품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냉소적이면서도 싱싱한 야성의 냄새가 난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특이하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 교양 없이 막돼먹은 사람들이 주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세태를 고발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까발린다. 더러운 욕망의 카니발에 그들은 민낯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가면을 쓰고 점잖은 척 할 뿐이다. 책 제목으로 삼은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성경의 장과 절을 흉내 낸 형식이 재미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의인 최순덕에게 내린 성령의 감화 감동 이야기라 이곳에 하나의 보탬과 빠짐없이 기록하나니'가 1장 1절이다. 최순덕은 열심 신자인 부모 밑에서 오..

읽고본느낌 2018.09.09

김 박사는 누구인가?

여름에는 소설 읽기가 제일이다. 요즘처럼 찜통더위가 계속될 때는 집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소설을 벗하는 게 최고의 피서다. 전기료가 걱정된다지만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힌다. 재미있는 소설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여름을 보낼 수 있다. 는 이기호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최근에 이기호 작가의 작품을 자주 읽는데 이야기가 경쾌하면서 생생하게 살아 있어 좋다. 그러면서 단단한 뼈대를 숨기고 있다. 쉽게 읽히지만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는 '탄원의 문장'이 제일 인상 깊었다. 대학교에서 일어난 과실치사 사고와 관련된 이야기다. 후배들 기강을 잡는다고 선배들이 강압적으로 술을 마시게 하고 훈계를 했다. 그중 한 여학생이 집으로 돌아간 뒤..

읽고본느낌 2018.08.16

영초언니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씨의 소설이다. 작가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막바지에 이른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반독재 민주화 학생운동을 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200일 넘게 감옥살이도 했다. 당시 작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천영초 선배 이야기를 이 소설에 담았다. 소설 형식을 빌렸지만 실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이 기록이 애틋한 것은 소설 주인공인 천영초는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현재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겨우 의식을 되찾고 고국에 돌아와 요양중이라고 한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하다. 영초언니만이겠는가, 운동의 앞장을 섰던 많은 이들이 고문의 후유증이나 가난으로 고통을 겪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에 그려진..

읽고본느낌 2018.08.11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봄밤' 등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책 제목처럼 주정뱅이가 등장하는 작품이 여럿이다. 작가 자신도 대단한 애주가인 듯하다. 또한 우리는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일정 부분 주정뱅이와 닮았다. 에서 '안녕'이란 주정뱅이에게 건네는 따스한 인사말 같다. 이 책에 모인 작품들은 공통되는 색깔이 있다. 인생의 고통과 비극을 드러낸 상처가 아프게 드러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살면서 맺어야 하는 인간과의 관계는 생채기를 남긴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 자체가 고(苦)의 원인이다. 견뎌내는 사람도 있지만 삶의 무게가 버거워 지쳐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인간 때문에 병든다. 에는 인간에 대한 슬픈 연민이 깔려 있다. 일곱 편 중에서 제일 관심을 끄는 ..

읽고본느낌 2018.05.05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작가의 '가족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그러나 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 가족의 실제 삶을 정감있게 보여주는 글 모음이다. 2011년부터 월간지에 연재된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슬며시 미소를 띄게 되다가도 찡해지는 순간이 많다.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삶의 애환이 맛깔스런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주며 살아가는 마음씨가 곱다. 글 한 편 한 편이 예쁜 삽화 같다. 책의 처음에 적힌 한 문장이 오래 눈길이 간다. "누운 자리는 좁았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 글 하나를 옮긴다. 이 책 제목으로 인용된 내용이 들어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까지도 책 제목을 착각했다. '여든'이 아니고 '여름'이라니, 나도 여덟 살 꼬맹이에 다름 아니다. 여름이 되면 올해 여..

읽고본느낌 2018.04.30

둔황의 사랑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다 읽지 못했는지 모른다. 내용이 어렵게 느껴져서 그랬을 것 같다.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보고 옛날이 어슴푸레 떠올라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역시 명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이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탐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알 것 같다.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주간 잡지의 기자로 일하며 가난하게 살아간다. 단칸방에서 동거하는 여자가 있지만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고 있다. 현실은 누추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꿈꾸는 세상은 따로 있다. 서역의 사자를 찾고, 공후를 불었다는 노인을 만나려 한다. '천세불변(千世不變)'이라고 비단 조각에 적힌 '누란의 소녀' 미이라도 주인공의 관심을 끈다. 우리는 찰나의 존재들이다. 사랑이 영원으로 이어지길..

읽고본느낌 2018.04.13

차남들의 세계사

"작가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관해 쓸 의무가 있다." 이기호 작가가 한 말로 기억한다. 작가의 글에는 세상의 고통과 인간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세상살이의 애틋함이 녹아 있다. 이 소설 도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는 대머리 독재자가 등장한 1980년대가 배경이다. 1982년에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일으킨 문부식과 김은숙은 지학순 주교가 있던 원주로 피신한 뒤 자수했지만, 수사 당국은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선다. 이때 택시 운전사였던 나복만은 아무 관련도 없으면서 이 사건에 엮이게 된다. 교통사고로 경찰서를 찾게 되었는데, 실수로 그의 이름이 사건 관련자 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우연이 겹치면서 독재 시대 때 흔했던 용공 조작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소설은 미친 시대에 한 인..

읽고본느낌 2018.04.06

노인과 바다

젊었을 때 읽었던 느낌은 어슴푸레하다. 고기와의 사투 장면만 남아 있는 걸 보니 그 부분이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체념이랄까, 자연과 인생을 대하는 노인의 마음이 각별히 다가온다. 산티아고 노인에게 자연은 정복 대상이 아니라 친구며 형제다. 삶의 터전인 바다도 여성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한다. 며칠 동안 청새치와 밀고 당기는 싸움을 벌이지만 바탕에는 생명에 대한 연민이 깔려 있다. 배로 찾아온 휘파람새나 거북을 대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삶의 현장으로서의 바다는 사납고 거칠지만 삶을 대하는 마음은 따스하다. 고기를 잡으러 홀로 바다로 나간 노인은 고독하다. 고독을 벗 삼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큰 청새치를 잡았지만 귀항 도중에 상어의 습격으로 뼈만 남긴 채 빈손으로..

읽고본느낌 2018.02.06

갑신년의 세 친구

전체적으로 역사에 무지하지만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19세기와 한일합방이 되는 20세기 초까지는 더욱 모른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배운 역사 교과서에서도 그리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 같지 않다. 우리의 어두운 부분이라 그냥 대충 넘어간 게 아닌가 싶다. 사실은 정확히 교육을 시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저 매국노 몇 명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역사의 진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자주 나온다. 정신을 똑바로 차릴 때다. 그런 점에서 그때의 상황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를 중심으로 당시의 급박했던 시대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 안소영 작가가 썼다.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읽고본느낌 2018.01.06

연대기, 괴물

올해 나온 임철우 작가의 소설집이다. 일곱 편의 중,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전쟁의 처절함 대신 현대 문명에서 소외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뭔가 체한 듯한 느낌은 마찬가지다. 이번 소설집인 에는 인생의 가련함이 특히 두드러진다. 첫 작품인 '흔적'은 여객선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70대 독거남이 주인공이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산속에서 홀로 지내던 당신은 갈 때가 다가왔음을 알고 부산으로 내려간다. '연대기, 괴물'은 지하철에서 자살하는 60대 노숙자의 이야기다. 전쟁의 상흔이 그를 폐인으로 내몰았다. '세상의 모든 저녁'은 쪽방에서 독거사한 한 노인의 슬픈 이야기다. '간이역'에는 암에 걸린 아내와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젊은 부부가 나온다. '이야기 집'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 같다. 단추눈아..

읽고본느낌 2017.10.24

아버지의 땅

임철우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이렇게 묵직한 글을 읽어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마치 러시아 소설을 읽는 것 같다. 컴컴한 동굴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은 임철우 작가의 단편집이다. '아버지의 땅'을 비롯해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임철우는 주제 의식이 뚜렷한 작가다. 전쟁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체제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인간 존재의 심연을 파헤친다. 둔중하지만 여운이 긴 울림이 있다. 내용은 어둡지만 문체는 간결하고 짜임새가 치밀하다. 단편소설의 전범을 보는 것 같다. 작품 중에서는 '그들의 새벽'과 '사평역'에 호감이 간다. '그들의 새벽'은 거대 폭력에 굴복하며 보신에만 몰두하는 우리들 소시민을 비유적으로 그린다. 이런 태도는 군화 발자국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미세먼지에..

읽고본느낌 2017.10.16

몽실 언니

초판이 1984년에 나왔으니 30년이 넘었다. 그 뒤에 TV 드라마로 방영되어 인기를 얻었다. 아마 '몽실 언니'라는 인지도는 드라마 덕분일 것이다. 그 드라마를 꾸준히 본 것 같지는 않고, 까만 치마와 흰 저고리의 몽실이 이미지는 아직 남아 있다. 권정생 선생의 의 감동이 커서 연이어 도 읽어 보았다. 시대의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우리 민중의 이야기지만 시대 배경이나 주인공의 연령대가 다르다. 무엇보다 는 소년소설로 동화에 속한다. 그러나 그 시대를 체험한 어른들에게 더 공감을 줄 것 같다. 책을 읽어보니 선생이 에서 말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다. 책의 머리말에도 분명히 나온다. "이 세상의 모든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은 인간을..

읽고본느낌 2017.09.18

한티재 하늘

책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가슴이 멨고 눈물이 흘렀다. 권정생 선생이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서럽고 고달팠던 우리네 백성들 삶의 이야기다. 먼 옛날도 아니다. 불과 100년 전 일이다. 책을 읽는 내내 외할머니가 떠올라서 더욱 그랬다. 외할머니의 일생 역시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 중 하나와 다르지 않았다. 청상과부가 된 뒤 새끼와 외손주를 키우느라 어느 곳 하나 뿌리 내리지 못하고 전전하며 사셨다. 그나마 배를 곯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었다. 은 권정생 선생이 쓰신 두 권으로 된 장편소설이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경북의 안동과 영양 지역이 무대다. 이리저리 짓밟힌 우리 선조들의 서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느낌을 전할 수는 없다. 직접 읽어봐야 한다. 그런데 내용이 완결되지 않은..

읽고본느낌 2017.09.10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작가의 글을 읽고 싶어 임의로 골라본 책이다. 전에 읽었던 '삼풍백화점'이라는 단편이 생각났고, 다른 작품은 어떨까, 라는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도 90년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세미, 준모, 지혜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다. 무대는 역시 강남이다. 세 아이는 모두 하나씩의 아픔을 갖고 있다. 그것이 셋을 단짝으로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 강남이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아이들의 아픔은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 이유로 가정이 붕괴된 세미는 할머니 손에 맡겨진다. 지혜는 부모의 불화로 고민이 크다. 준모는 틱 장애로 결국은 학교를 자퇴한다. 아픔은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다. 셋은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힘든 시기를 헤쳐 나간다. 의식이 건전하고 그 또래에서 생기는 불량기도 없다. 어려운 ..

읽고본느낌 2017.09.04

끝없는 벌판

메콩 강에서 오리를 기르며 유랑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가출한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는 집을 불태운 뒤 어린 남매를 데리고 배 한 척에 몸을 맡긴다. 상처투성이인 그가 제대로 된 아버지 노릇을 할 리가 없다. 남매는 벌거숭이인 채로 냉혹한 자연과 세상에 내던져진다. 책을 덮으니 가슴이 아리고 먹먹하다. 은 베트남 작가인 응웬욱뜨의 소설이다. 젊은 여성 작가인데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하고 깊다. 적의보다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앞선다. 작가는 문학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남매의 성장기를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베트남 소설은 처음 읽어 보지만 기대 이상의 감동을 받았다. 생명력이란 길 위의 질경이와 같다. 발바닥에 무..

읽고본느낌 2017.05.06

공터에서

김훈의 근작 소설이다. 작가의 문체에 끌려 이 책을 찾아 읽었다. 김훈은 가장 개성 있는 작가다. 짧고 건조한 문장이 매력이 있다. 감정이 배제된 서술은 시베리아의 찬바람 같다. 이즈음에 더욱 만나고 싶은 글이다. 이 소설에서도 김훈의 문체는 도드라진다. 반면에 내용은 밋밋한 편이다. 그것 역시 작가의 특징인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김훈의 문체는 스케일이 큰 경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비장미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에서 대규모 전투와 순장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이었다. 는 마 씨 가족 두 세대의 역사를 담았다. 일본 강점기 시대, 해방, 6.25 전쟁, 월남전, 군부독재 등 파란만장했던 근대사 속에서 살았던 힘 없는 민초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은이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

읽고본느낌 2017.04.23

연금술사

뉴질랜드 여행 중에 읽은 책이다. 바쁜 일정에서 짬을 내기가 힘들었고, 일행이 트레킹을 떠날 때 혼자 숙소에 남아 빈둥거리며 책을 읽었다. 나에게는 무엇을 보고 경험하기보다 이런 여유 시간이 필요했다. 이것이 여행에서 나의 가장 큰 호사였다.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 데 있도다." 책에서 제일 인상적으로 다가온 구절이었다. 어떤 상인이 행복의 비밀을 배워오라며 자기 아들을 현자에게 보냈다. 젊은이가 찾아간 현자의 주택은 화려했고, 여러 사람들로 북적였다. 겨우 현자를 만나 행복의 비결을 물었더니 현자는 저택을 구경하고 두 시간 뒤에 오라고 했다. 그리고 기름 두 방울이 담긴 숟가락을 건네며, 돌아다니는 동안 찻숟가락의 ..

읽고본느낌 2017.03.16

양철북

개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건 흥미롭다. 10대는 한 인간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때이므로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 시절은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발견하면서 공감한다. 은 이산하 시인의 성장소설이다. 작가가 꿈인 고등학생 철북이 구도승인 법운스님과 전국을 순례하며 깨달음을 얻어가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몸으로 부딪치며 세상을 배운다. 구체적인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라 함께 지내고 얘기하며 자연스레 눈을 떠간다. 소설에서 철북이 스님과 나누는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고등학생의 지적 수준은 이미 뛰어넘었다. 작가를 꿈꾸는 소년의 엄청난 독서량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늘 선문답 같은 말이 ..

읽고본느낌 2016.08.22

채식주의자

유명 문학상을 받은 작품과 독자가 받는 감동이 비례하지는 않는다. 기대가 커서인지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럴 때는 전문가는 역시 보는 눈이 다르구나, 하고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올봄에 한강은 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 영미권에서는 꽤 권위 있는 상인 것 같다. 한국 작가가 세계적인 상을 받은 소식은 모두를 기쁘게 했다. 경제나 스포츠 분야에서의 성취에 비해 문학이나 사상 같은 정신적인 면에서는 많이 뒤처져 있었다. 수상을 반기는 건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는 수상 소식을 들은 뒤에 책을 사서 읽어 보았다. 그런데 느낌을 글로 옮기려니 굉장히 막막했다.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소설이 품고 있는 함의를 읽어내기가 내 수준으로는 어려웠다. 큰 상을 받은 작품을 내 멋대로 ..

읽고본느낌 2016.07.21

소금

박범신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구조를 드러내 보이겠다고 했지만, 이야기 전개가 부자연스러워 효과가 반감된다.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래도 이 소설 은 우리 시대와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준다. 자본주의는 빨대와 깔대기의 거대한 네트워크란 작가의 말에 동의하지만 아버지만 희생자라고 할 수도 없다. 피해자는 아버지를 포함한 체제 속의 모든 구성원들이다. 소설은 아버지를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선명우는 열심히 일해서 회사의 상무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가정에서 그의 자리는 없다. 아내와 세 딸의 화려한 소비를 뒷받침해주기 위한 돈 버는 로봇일 뿐이다. 별나긴 하지만 우리 시대 아버지의 표상으로 봐도 무난하다. 어느 날 선명우는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

읽고본느낌 2016.04.27

소설가의 일

김연수 작가의 소설 작법이다. 딱딱한 교재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수필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소설 쓰기만이 아니라 인생론이기도 하다. 글을 쓴다는 건 삶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쓰기에 관한 책이라는 걸 모른 채 읽었다. 서가에서 훑어볼 때는 소설가의 일상에 대한 산문이라고 생각했다. 소설가의 일상이 소설 쓰는 일일 테니 소설 작법에 관한 내용이어도 속은 것은 아니다. 이과 전공으로서 문학 원론에 관한 내용이 색다르고 흥미로웠다. 책 내용 중에서는 생각하지 않고 쓴다는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은이는 '감각으로 쓰고 생각하며 교정한다'고 말한다. 쓰기보다는 고치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구성을 완벽하게 결정해 놓고 소설 쓰기에 들어가는 줄 알았다. 한 번..

읽고본느낌 2016.02.28

디 마이너스

1990년대 후반의 대학 생활을 그린 손아람의 장편소설이다. 90년대 학번은 대학에서 마지막 운동권 세대라 할 수 있다. 전대협과 한총련으로 이어진 학생 운동 그룹은 NL과 PD 계열로 나누어지고 후반에는 연대회의와 전학협이 주도했다. 이 소설 는 연대회의에서 활동한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상과 갈등, 사랑, 대학 생활의 애환을 담고 있다.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면서 점차 힘이 떨어지는 게 아쉽다. 내 대학 시절과 비교하면 학생들의 의식에서 굉장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90년대는 제도적으로는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그래서 투쟁의 내용도 우리와는 달랐다. 정치적 이슈보다는 경제 불평등의 개선에 비중이 커졌다. 학생 운동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 뒤로 대학은 자본의 논리에..

읽고본느낌 2016.02.10

투명인간

소설을 읽으며 영화 '국제시장'과 내내 비교되었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얘기를 풀어가는 결은 다르다. 영화가 가족을 위해 고생하며 오늘의 풍요를 이룬 세대의 자부심을 그렸다면, 소설 은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 이런 관점의 영화가 제작되어 '국제시장'과 대비시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여러 화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주인공은 만수다. 부자였던 할아버지가 일제 때 독립운동과 연관되어 재산을 다 잃고 화전민이 사는 산골로 숨어든다. 아버지는 이런 할아버지가 못마땅해 글공부는 버리고 억척같이 땅을 일구며 가족을 부양한다. 만수는 육 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외모는 볼품없고 형제들 중 머리도 제일 나쁘지만 심성은 착하기 그지없다. 오직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읽고본느낌 2015.12.30

1Q84

1, 2권은 전에 읽었는데 한참 사이를 두고 이번에 3권을 마저 읽었다. 1권을 읽을 때의 긴장감은 덜했지만 하루키의 필력에는 여전히 감탄했다. 하루키는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위장에 문제가 있는 물리교사' 같은 표현에는 무릎을 쳤다. 워낙 문장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보여선지 내용이 받쳐주지 못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이다. 전체 분량이 2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데도 지루하지는 않다. 그러나 다 읽고 났는데도 선명하게 남는 건 없다. 이건 뭐지, 라는 어리둥절한 느낌이다. 작가의 속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겠다. 가볍게 생각하면 이렇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1Q84 세계를 산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새로운 눈이 떠지고 이후의 세계는 전과는 완전히 ..

읽고본느낌 2015.09.07

잠실동 사람들

서울 강남 엄마들의 극성스런 교육열을 다룬 정아은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재건축된 잠실 고층아파트에 살고 있는 상류층 주부들의 욕망을 펼쳐 보인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초등학생 학부모로 오직 일류 대학을 목표로 아이들을 닦달한다. 입시라는 전쟁터에서 아이들은 소모품일 뿐이다. 자아 반성이 없는 엄마의 탐욕 아래 아이들은 병들어간다. 부유한 잠실동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도 등장한다. 몸을 팔며 학비를 벌어야 하는 대학생 서영, 가짜 경력을 내세워 과외 교사를 하는 김승필, 학습지 교사나 가사 도우미들이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이다. 소설에는 악한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각자의 생활 양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일상이 문제다..

읽고본느낌 2015.06.11

나의 몫

이란의 여성 작가인 파리누쉬 사니이의 장편소설이다. 이슬람 문화권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IS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만행을 통해 단편적인 소식만 접할 뿐이다. 편견과 사실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이 소설을 읽었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근본 질문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슬람이라고 특별한 종교가 아니다. 사람살이는 어디나 마찬가지다.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 혁명 시기가 이 소설의 주 무대다. 종교의 권위가 강한 가부장적 가정에서 자란 마수메는 인간의 기본 감정마저 억압당한 채 강제 결혼을 당한다. 가정에 아무 관심도 없는 남편은 공산주의 혁명가다. 안으로는 자식을 챙기고, 밖으로는 자아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한 여인의 일생이 파란만장하게 그려진다. 이..

읽고본느낌 2015.05.11

청동정원

80학번 최영미 작가의 자전소설이다. 고3 입시 전쟁부터 서울대 입학, 운동권 활동, 사랑, 결혼, 이혼의 아픔, 그리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자유발랄한 영혼이 시대의 고뇌에 동참하고 방황하면서 자신의 꿈을 좇아 나가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생생하다. 책에 빠져 단번에 읽었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 내 청춘이 떠오른다. 시대는 달라도 누구나 비슷했을 것이다. 고민의 방향은 개인마다 달랐겠지만 시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젊음은 없었다. 그중에 일부는 운동에 뛰어들고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은 80년대 운동권의 모습을 사실대로 보여준다. 한 시대의 기록화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초 상황도 비슷했다. 박정희의 유신 통치가 시작되고 얼음왕국이 되었다. 학교에는 군대가 진주하고 문 닫는 날이 더..

읽고본느낌 2015.03.05

관촌수필

오래전에 읽다가 만 소설인데 이번에는 아주 재미있게 완독했다. 젊었을 때는 이런 소설 읽기가 힘들었는가 보다. 무엇이건 때가 무르익어야 자연스레 된다. 에는 고향의 정경과 인정이 토속어와 함께 생생하게 살아 있다. 문체에서도 고전적인 향취가 난다. 사라져 간 고향과 사람들을 이만큼 서정적으로 묘사한 글도 만나기 어렵다.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특히 충청도 지방의 사투리가 작품의 맛을 더한다. 자전적 소설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어휘를 구사하자면 많은 공부와 노력이 들었을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의 집은 한산 이씨의 잘 나가는 양반이었다. 증조부는 상주목사를 지냈다. 그러나 육이오 전쟁을 겪으면서 집은 풍비박산이 났고, 작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읽고본느낌 2015.01.12

높고 푸른 사다리

가톨릭 수도원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난 이런 종교소설이 좋다. 홀딱 빠져서 이틀 밤새에 다 읽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흥미 있는 소재일 수밖에 없고, 영혼의 고뇌나 신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는 고금을 불문하고 소설의 주제로 알맞다. 소설에서 감동적인 부분은 두 군데였다. 첫 번째는 토머스 수사가 죽음을 앞두고 요한 수사에게 유언처럼 전해주는 내용이다. 토머스 수사는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독일인으로 1941년에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원산 가까운 덕원에 소재한 수도원이었다.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고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당 치하에 남게 된다. 그리고 옥사덕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하며 신앙의 힘으로 버텨 낸다. 인간은 고난 앞에서 무릎 꿇..

읽고본느낌 2014.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