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흑산

샌. 2020. 2. 23. 15:22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1800년 전후 시기의 천주교 박해가 중심 이야기다. 당시의 부패한 정치와 피폐한 백성의 삶이 바탕에 깔려 있다. 무겁게 읽히는 책이다. 시대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스려져 간 인간의 고통과 눈물이 김훈 작가 특유의 문체로 잘 그려져 있다.

 

<흑산(黑山)>이라는 제목만 보면 정약전이 주인공인 것 같은데, 이 책에는 뚜렷한 주인공이 없다. 정약전이 등장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정약전과 황사영을 중심으로 이들과 관계된 다수의 인물이 모두 주인공이다. 황사영의 부인인 정명련, 정약현 집 노비였던 김개동과 육손이, 마부 마노리, 아전 출신의 첩자 박차돌, 퇴물 상궁 길갈녀, 국밥집 주모 강사녀, 도망친 노비 아리 등의 이야기가 천주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일러두기에서 이 책은 소설이며 역사적 실존 인물 외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허구임을 밝히고 있다. 그래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알아둘 만하다. 그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은 대체로 이렇다.

 

1776년  정조 즉위.

1779년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이 경기도 광주 주어사에서 천주교 교리를 토론함.

1784년  이승훈이 북경의 북당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해서 이벽, 권일신 등과 명례방에서 모임을 가짐.

1785년  천주교 모임이 적발되어 양반 자제들은 풀려나고 중인인 김범우만 유배당했다가 사망.

1790년  황사영이 정약현의 맏딸 정명련과 결혼.

1791년  전라도에서 윤지충이 모친상에서 신주를 없애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다가 참수됨.

1794년  주문모 신부 입국.

1797년  정약용이 정조에게 서양의 사설에 빠졌던 일을 뉘우치는 상소를 올림.

1800년  정조 승하. 순조 즉위.

1801년  신유박해(정약종, 황사영, 이승훈, 최필공, 권철신 등 다수가 참수되고 옥사함.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됨).

1810년  정약용 방면.

1811년  홍경래의 난.

1815년  을해박해.

1816년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죽음.

1845년  김대건이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음.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됨.

 

<흑산>에서 묘사된 정약전의 흑산도 귀양 생활은 육지의 피바람에 비하면 평온했다. 민가에 맡겨져서 자유롭게 생활했고, 곁에서 시중드는 여인도 있었다. 흑산도의 관리는 훗날을 염려해 정약전의 눈치를 보는 처지였다. 그러나 형제와 친척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절해고도로 유배 온 애절한 심정을 소설에서는 애써 그리지 않는다. 정약전은 물고기에게 마음을 주고 <자산어보>를 씀으로써 자신을 달랬는지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은 정약전이 섬 아이들을 위해 서당을 여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은 조선 후기 민초들의 신산한 삶이 잘 담겨 있다. 부패한 정치는 백성을 마을에서 쫓아내고 길에서 굶어 죽게 만든다. 삶의 끝에서 만나는 천주교의 평등과 구원은 복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려 했다. 정약종, 황사영 같은 유자(儒者)들이 이 대열에 앞장섰다. 기득권층에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또 하나의 피의 역사를 만들었다. <흑산>은 소설로 그려진 그 시절 역사의 수레바퀴에 사라져 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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