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상냥한 폭력의 시대

샌. 2020. 3. 2. 12:07

정이현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를 비롯해 일곱 편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두 편은 전에 어딘가에서 읽어본 작품이다. 작가는 인간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시니컬하게 드러낸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가면을 벗기는 솜씨가 탁월하다. 작품의 분위기는 쓸쓸할 수밖에 없다. 건조하고 까칠한 세상을 작가는 차분하면서 냉정하게 그려낸다.

 

"미소 없이 상냥하고 서늘하게 예의 바른 위선의 세계. 무서운 것도, 어색한 것도, 간절한 것도 '없어 보이는' 삶에 질기게 엮인 이 멋없는 생활들에 대하여." 책 뒷면에 적힌 이 문장이 작가가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잘 말해준다. 우리는 상냥하게 악수를 하지만 손에는 칼을 품고 있다. 상처가 아물 날이 없이 또 다른 손을 맞잡으며 살아간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가장하면서.

 

<상냥한 폭력의 시대>에 실린 작품 중에서 '안나'가 눈에 들어온다. '경'과 '안나'라는 대비되는 두 여자의 이야기다. 경은 남편이 의사이면서 자신도 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다. 전형적인 강남 아줌마의 속물성을 대변한다. 교양과 우아함으로 무장해 있지만 속에는 우월성과 계급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영위하는 안나와의 만남을 통해 감출 수 없는 속성이 드러난다. 그들만의 성을 쌓는 안정된 상류층의 모럴은 이미 우리 사회의 한 부분으로 자라잡았다. 경과 안나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다.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가 그런 식으로 고착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저소득층 지원 정책을 폈음에도 지니계수는 역대 최악을 기록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지니계수가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였는데 2018년부터 급등한 것이다. 정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은 계층 간의 불협화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빈부격차와 계층 간의 공동체 의식 단절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심각한 병리 현상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집 제목에 나오는 '상냥한 폭력'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교양과 종교의 겉옷을 입고 상냥하고 친절해 보이는 그들은 누구인가. 따스함으로 위장한 폭력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이 시대의 위협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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