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영초언니

샌. 2018. 8. 11. 11:30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씨의 소설이다. 작가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막바지에 이른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반독재 민주화 학생운동을 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200일 넘게 감옥살이도 했다. 당시 작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천영초 선배 이야기를 이 소설에 담았다. 소설 형식을 빌렸지만 실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이 기록이 애틋한 것은 소설 주인공인 천영초는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현재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겨우 의식을 되찾고 고국에 돌아와 요양중이라고 한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하다. 영초언니만이겠는가, 운동의 앞장을 섰던 많은 이들이 고문의 후유증이나 가난으로 고통을 겪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에 그려진 영초언니는 섬세하고 여린 성격이지만 당찬 여인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과 정의감이 강했다. 이 소설은 국가 폭력이 만연한 야만의 시대에 영초언니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어떻게 싸웠는가를 보여준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분위기에 대한 저항도 나온다. 둘은 일맥상통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빚진 심정이 되어 어딘가로 숨고 싶다. 같은 7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지만 나는 방관자에 가까웠다. 현실 인식에서부터 뒤처졌고 적극적으로 나설 용기도 없었다. 데모 대열 꽁무니에 붙었다가 최루탄이 터지면 제일 먼저 도망가는 게 고작이었다. 휴강이 되면 공부 안 한다고 좋아했다. 철딱서니 없던 시절이었다.

 

<영초언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군사독재 정권이 물러가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젊음을 바쳐 헌신한 이들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영초언니처럼 야속한 운명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영초언니의 남편인 정문화 씨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 3대 천재로 꼽히던 그는 연속되는 불운으로 일찍 생을 마감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었다.

 

그때로부터 40년이 흘렀다. 그들이 만들고자 한 나라는 찾아왔는가? 군사독재는 물러갔지만 또 다른 강고한 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때는 목표가 분명하고 눈에 보였지만, 지금은 전선조차 흐릿해졌다. 분명한 것은 반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이 있어 사회는 진보한다는 사실이다. 당사자는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하지만. 미안하고 안스럽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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