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시의 문장들

샌. 2018. 7. 31. 11:07

책머리에 나오는 '왜 시를 읽느냐 묻는다면'이라는 글이 인상 깊다. 시를 읽는다는 것이 살아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에 대한 답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시를 읽는 것은 사는 데 도움이 되고 쓸모도 있다고 말한다. 시는 당신 인생에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왜냐하면 시는 '다르게 보는 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언어의 반전을 통해 기존의 세계를 뒤집는 것, 그리하여 세계의 틈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 그것이 시의 힘이다.

 

시를 읽는 것은 멈춰서 돌아보는 것이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듯이 시 한 편을 읽으며 마음을 빗는 것이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나면 다시 먼 길을 갈 힘이 난다. 남들이 좋다는 이 길 저 길 기웃거리지 않고 시를 등불 삼아 오롯이 내 갈 길을 갈 배짱이 생긴다. 특히 아프고 쓰린 마음을 위로하는 데는 시만 한 게 없다. 기쁜 때는 기쁜 대로, 힘들 때는 힘든 대로, 시는 노래가 되고 휘파람이 되고 한숨이 되고 눈물이 되어 행복한 사람은 춤추게 하고 아픈 사람은 위로해 준다.

 

시를 사랑하는 김이경 작가가 쓴 <시의 문장들>은 시 감상 노트다. 시 전체를 소개하지 않고 가장 감명 깊었던 구절만 인용하며 작가의 감상을 붙였다. 둘이 참 잘 어울린다. 시에서도 에센스만 뽑아냈으니 그 자체로 빛나지만, 작가의 감상이 보태져 보석이 되어 반짝인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열다섯인가 열여설 살 때, 죽고 싶었다.

나 같은 게 살아서 뭐하나 싶고, 나 하나쯤 없어져도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았다.

방문을 닫고 죽을 채비를 하는데 문득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경아, 사과 먹어."

만날 이름 대신 "야!" 하고 소리나 지르던 엄마가 그날은 왠일인지 다정하게 불렀다. 경아!

비죽 눈물이 나왔다. 몰래 들고 온 아버지 넥타이를 팽개치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엄마, 엄마."

사과를 깎던 엄마가, 얘가 왜 이러니, 고개를 꺄우뚱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사춘기 때 처음 이 시를 읽고는 '나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지' 다짐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시를 읽는 게 부끄러움이 되었다. 아마 부끄럽지 않게 살려면 작은 일에도 마음을 써야 한다는 걸 안 다음부터일 것이다. 일테면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도 그냥 넘기지 않는.

요새는 아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외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다간 신경 쇠약에 걸린다고 큰소리를 친다. 뻔뻔하게.

 

작가의 개인적 체험과 어우러지니 시가 팔딱팔딱 살아나는 것 같다. 책에는 108개의 시가 소개되고 있다. 나도 시를 좋아하고 많이 읽는 편이지만  처음 접하는 시가 태반이다. 시 제목만 봐도 배부르다. 앞으로 찬찬히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나는 아버지보다 늙었다 / 박진성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이근화

꽃핀 나무 아래 / 허수경

복사꽃 아래 천년 / 배한봉

송산서원에서 묻다 / 문인수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 윤재철

수렴지실 / 이윤림

검은 담즙 / 조용미

엽서, 엽서 / 김경미

관계 / 김선우

 

내 집 / 천상병

순례 서 / 오규원

저녁 / 임원태

시간들 / 안현미

귀 조경 / 이홍섭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오 분간 / 나희덕

난독증 / 여태천

보고 싶은 친구에게 / 신해묵

강박 / 백무산

 

자작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

젊음을 지나와서 / 김형수

패배는 나의 힘 / 황규관

그래서 / 김소연

또 다른 충고 / 장 루슬로

 

노인의 한 가지 즐거움 / 정약용

물속에서 / 진은영

공허의 근육 / 김재훈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 고정희

세상에 없는 책 / 윤희섭

 

1년 / 오은

참 좋은 저녁이야 / 김남호

슬픈 국 / 김영승

딸 / 이선영

내 운명 / 두르가 랄 쉬레스타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 김남주

길이 아닌 길 / 이선영

인생 레시피 / 헨리 루더포드 엘리어트

 

별, 끝나지 않은 기쁨 / 마종기

푸른 힘이 은유의 길을 만든다 / 배한봉

서쪽이 없다 / 문인수

자유로 / 황인숙

호동거실 / 이언진

 

음악감상 / 윤병무

애기똥풀이 하는 말 / 정일근

축, 생일 / 신해욱

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 체리 카터 스코트

강 / 이성복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 이윤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

서시 / 박영근

늙은 마르크스 / 김광규

딸을 위한 시 / 마종하

 

스타킹을 신는 동안 / 최정례

가을 드들강 / 김태정

안개 / 신기섭

밴댕이 / 함민복

어린 시절의 밥상풍경 / 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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