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14

인간적이다

요사이는 짧고 가벼운 글을 주로 읽는다. 길고 무거운 주제는 감당하기 어렵다. 얼마 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를 인내심을 발휘해서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다. 무려 1천 페이지나 되는 대작이다. 호흡이 너무 느려서 이런 소설은 지금의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는 소설가 성석제의 짧은 이야기집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한 편이 서너 장 정도밖에 안 되니 콩트에 가깝다. 굳이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고등학교 때 배운 용어로 장편소설(掌篇小說)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장에서 팝콘을 먹듯 즐겁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서 짧은 글 속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만나는 것 같다. 소설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일상의 사건들이 모여 소설가의 부엌에서 맛난 음식으로..

읽고본느낌 2014.11.08

사람의 맨발

한승원 작가의 장편소설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렸다. 세상 부조리에 대한 싯다르타의 고뇌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출가에 초점을 두었다. 소설은 싯다르타가 열반한 뒤 스승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카사파에서 시작된다. 카사파가 슬퍼하고 있을 때 관이 터지며 싯다르타의 발이 밖으로 뻗어 나온다. 싯다르타의 두 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난 출가자의 표상이다. 싯다르타가 두 발을 카사파에게 보인 것은 만천하의 인민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기 위하여 험한 길을 걸어다닌 맨발의 의미를 잊지 말라는 당부인 것이다. 싯다르타는 사카 왕국의 임금으로 인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다. 카스트 신분 제도를 신의 뜻이라며 강요하고 인간을 속박하는 계급사회를 싯다르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모두가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

읽고본느낌 2014.07.21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딸네 집에 갔다가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을 펴고는 단숨에 읽었다. 돋보기를 가져가지 않아 침침한 눈이었지만 한 번 빠져드니 헤어나지 못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는 돈과 외모지상주의에 맹종하는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 시스템을 고발한다.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를 지배하는 전략이 부와 아름다움에 대한 신화를 부풀리는 것이다. 돈과 예쁜 여자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대중은 부나비처럼 부와 아름다움을 향한 경쟁 대열에 뛰어든다. 소수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다. 가혹한 세상에 들러리를 선 시녀의 처지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여자는 놀림을 받고, 소외되..

읽고본느낌 2014.03.25

1984

젊었을 때 읽은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1984년이 다가올 미래였지만, 지금은 지나간 과거다. 소설에서 그린 것과 같은 1984년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래에 대해 자꾸 비관적이 되는 건 왜일까? 시절이 더 수상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어 세상을 더 사실적으로 보게 된 탓일까? 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개인의 마음까지 당이 장악한다.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세 초강대국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계급사회다. 오세아니아는 맨 꼭대기에 빅 브라더가 있고, 그 밑에 당원이 있으며, 하층의 노동자 계급으로 되어 있다. 세 나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지만 이는 공포를 조성하여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주민을 통제하기 위해 과거를 조작하고, 아예 인간성을..

읽고본느낌 2013.11.26

난설헌

너무 영민하고 너무 감성적이어서 시대와 불화했던 여인 허초희(許楚姬, 1563~1589), 스스로 지은 난설헌(蘭雪軒)이라는 호 그대로 그녀는 눈 속에 핀 한 송이 난초였다. 부모와 형제의 사랑을 받으며 자유로운 가풍에서 성장한 그녀는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웠고, 여덟 살 때 '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일찍이 천재성을 보였다. 그러나 열다섯 살 때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혼인하면서 시어머니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로 삶이 삐걱댔다. 더구나 제 손으로 키워보지도 못한 어린 두 자식을 일찍 여의고 나서는 생의 의욕마저 상실했다. 문학에의 열정도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고,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불행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은 최문희 작가가 쓴 허난설헌의 일대기로 혼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난..

읽고본느낌 2013.10.25

두근두근 내 인생

창비에서 펴낸 젊은 작가의 소설을 두 권 읽었다. 김애란의 과 김학찬의 였다. 둘 다 30대 초반의 작가답게 신선하고 경쾌하며 재미가 있었다. 은 조로증에 걸린 열일곱 살 소년의 마지막 1년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열일곱이지만 육체 나이는 여든을 넘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병에 시달리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산 소년은 책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찾아낸다. 두근거리는 사랑도 경험한다. 무거운 주제일 수 있지만 극한 상황에서도 빛나는 인간성이 젊은 작가의 손에 의해 아름답게 그려졌다. 는 붕어빵 명인인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가려는 스물아홉 청년의 독특한 이야기다. 그는 일본에까지 가서 타꼬야끼를 굽는 비법을 전수받고 온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갈등, 불안한 젊은 세대의 고민 등이 함께 그려진다..

읽고본느낌 2013.09.22

원미동 사람들

이 소설이 처음 나온 게 1987년이었으니 벌써 26년이나 되었다. 그때는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읽어보지를 못했고, 세상이 세 번이나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흘러서야 인연이 맺어졌다. 숲에서는 숲을 볼 수 없듯이 이렇게 좀 떨어져서 80년대를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싶다. 양귀자의 은 2년에 걸쳐 문학잡지에 연재된 11개의 소설로 된 연작집이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 부천 원미동(遠美洞)에서 작가 자신이 살면서 동병상련한 이웃 이야기를 그렸다. 개발시대를 대표하는 원미동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동네였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인간을 얼마나 피폐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침통한 심정과 분노에 가까운 감정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원미동 사람들에게 삶은 살아내..

읽고본느낌 2013.07.25

백년 동안의 고독

장맛비를 벗삼아 읽었다. 은 콜롬비아 작가인 마르케스(G. G. Marquez)의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소설은 마콘도에서 살아가는 5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에 관한 이야기다. 선조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마콘도 마을을 건설했을 때는 에덴동산이 연상될 정도로 낙원이었다. 그러나 집시들이 찾아와 문명 세계의 신기한 물건을 보여주면서부터 마을은 변해 간다. 부화뇌동하는 주민들은 변화의 흐름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 현대적 행정 조직과 철도가 들어오고 미국인은 바나나 농장을 지어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을은 몰락하고 부엔디아 가문의 맨 마지막 후예가 끝을 목도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맺는다. 마콘도는 콜롬비아에 있는 작은 마을이 아니라 현대화 과정을 밟아가는 모든 공..

읽고본느낌 2013.07.11

이방인

카뮈의 이 소설을 다시 읽어 보았다. 아니, 처음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전이란 무엇인가? 읽지 않았으면서도 읽은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는 책이다. 도 그런 류다. 읽은 기억은 전혀 나지 않은데 응당 읽었을 것 같은 책이다. 역시 혼란스럽다.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 존재를 '피투(被投)'라는 말로 설명한 게 떠오른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내던져진 존재다. 또 세상은 내 뜻과는 아무 상관 없이 돌아간다. 뫼르소는 그런 상황을 극단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건 아닐까? 뫼르소가 보인 세상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은 피투된 존재의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은 세상과 삶의 본질을 까발린다. 눈부신 알제리의 햇빛 아래 가식으로 덮인 일반적인..

읽고본느낌 2013.06.18

소설 공자

는 최인호 작가의 근작 장편소설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료에 근거하여 공자의 삶을 재구성했다. 공자의 출국과 주유천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가 오늘과 별로 다르지 않다. 2천 년 전 예수가 살았던 유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성인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되는 책이다. 책에는 공자 외에 노자와 장자, 예수 이야기도 나온다. 공자의 사상과 비교하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유가와 도가의 차이를 좀더 명료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차이가 그분들의 삶에서도 완연히 드러난다. 노자는 세상에 알려지자 함곡관을 통해 사라졌지만, 공자는 끝없이 세상과 권력을 찾아 들어간다.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시밭길을 가는 것이다..

읽고본느낌 2012.08.28

악의 심연

더위를 잊기 위해 스릴러 소설을 골랐다. 막심 샤탕의 이다. 이틀에 걸쳐 읽었는데 어젯밤에는 무서워서 문을 꽁꽁 잠그고 잤다. 더위를 잊으려다 도리어 더위를 더 맞이한 셈이 되었다. 소설에는 인육을 먹는 등 너무 잔혹한 장면이 나온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뒷 느낌이 꺼림찍하다. 아무래도 책을 잘못 골랐다. 그러면서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 둘 수 있다. 스릴러의 매력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타인의 비극을 엿보려는 심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호기심으로 손가락 사이를 살며시 연다. 머리가죽이 벗겨진 여자가 뉴욕의 공원을 발가벗고 도망가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예순일곱 명의 실종사건이 드러나고 범인들의 윤곽이..

읽고본느낌 2012.08.08

마교사전

문화대혁명 시기에 지식 청년 한소공(韓少功)은 산간오지인 마교로 하방되어 강제 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낯설고 물 선 그곳에서의 경험이 뒤에 (馬橋詞典)이라는 소설로 태어났다. 이 소설은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마교 사람들이 쓰던 115 개의 단어를 중심으로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마교는 현대문명과는 단절된 산골의 작은 촌락이다. 소설에는 문명으로 오염되기 이전의 인간 본연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 소설은 주된 줄거리가 있는 전통적인 형식을 떠나 모든 사건들이 병렬적으로 전개된다.우리 삶은 여러 개의 인과의 실마리가 교차하는 가운데 꾸려지고 있다. 전통적인 소설의 방식은 주된 줄거리가 작자와 독자의 시야를 독점함으로써 주변을 돌아볼 수 없게 하는 단점이 있다. 작가가 ..

읽고본느낌 2011.05.21

강남몽

박선녀,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났으나 여상에 다닐 때 예쁜 외모와 몸매로 우연히 모델로 발탁된다. 그녀는 룸살롱 종업원을 거쳐 마담이 되고 강남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하며 돈을 많이 번다. 그녀가 만났던 세도가들의 도움이 컸다. 나중에는 대기업 회장의 세컨드가 되어 최상류 계층으로 뛰어오르고, 강남의 백 평 빌라에서 딸과 함께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 1995년 그날, 남편의 소유였던 삼풍백화점에 들렀던 그녀는 건물이 붕괴되면서 매몰된다. 임정아도 시멘트 더미 사이에 갇혔다. 그녀 역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삼풍백화점 지하 일층 아동복점 매장에서 근무했다. 그녀의 부모는 시골에서 상경하여 구로동 봉제공장에서 일하다가 결혼했고 도시 개발로 변두리로 밀려나며 가난하게 살았다. 동생은 다리를 못 쓰는 장애를 가졌다..

읽고본느낌 2011.03.08

내 젊은 날의 숲

동료가 이 책을 선물했다. 김훈 얘기를 몇 차례 했더니 내가 김훈의 애독자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김훈의 문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수식이 배제된 건조한 단문이 그분 글의 매력이다. 은 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립수목원에 계약직으로 취직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민통선 안의 격리된 수목원에서 꽃과 나무의 세밀화를 그리는 일을 한다. 그녀의 삶은 단조롭고 드라이하다. 격렬한 감정의 충돌도 없고 열정적인 사랑도 없다. 몇몇 등장인물들과 유해발굴단의 유골 묘사를 통해 인생의 쓸쓸함과 무의미성이 그려지고 있다. 김훈의 소설에 공통되는 산다는 것의 막막함이 조금 스타일을 달리 하지만 이번 책에서도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은 6.25 때의 전사자 유골발굴단 작업에 참여한다. 발굴 현장의 유골을 세밀화로 그리..

읽고본느낌 2011.01.19

공무도하

간결한 문체 때문에 김훈의 글에 끌린다. 그분의 글은 짧고 건조하다. 살이 붙어있지 않은 생선 가시 같다. 감정의 낭비가 심한 글보다 이런 드라이한 글이 마음에 든다. 이런 문체는 삶의 비애를 드러내는데 알맞다. 그분은 늘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에 대해 말한다. 일상은 비루하고 치사하다. 부조리하고 희망 없는 세계를냉혹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묘사한다. 세상의 치부는 숨을 데가 없다. 에서 가야의 순장 장면과 백제군의 집단 처형 장면은 나로서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비극을 그릴 때 김훈 문체의 진가가 드러난다. 이번에 를 읽은 것은김훈 문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다. 소설에는 비극적 인물 군상들이 병렬로 등장한다. 개에게 물려죽은 판잣집 아이, 누이를 강간하는 아비를 죽인 청년, 크레인에 깔려죽은 여고생, ..

읽고본느낌 2010.09.24

미실

‘그녀의 치마가 펄럭였을 때 세상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김별아의 장편소설 을 읽었다. 에 기록되어 있다는 ‘미실(美室)’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소설 내용으로 보면 무척 독특했던 여성이었던 것 같다. 미실은 자신만이 가진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활용해서 임금을 비롯한 뭇 남성들을 손아귀에 쥐고 정치적 야망을 이룬 스케일이 큰 여자였다. 그녀는 총명하고 명민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교활했다. 그녀는 남자들의 심리를 기막히게 파악하고 있었다. 한번 관계를 맺으면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성들의 로망이었지만 동시에 팜므 파탈이기도 했다. 미실은 대원신통이라는 핏줄을 가진 색공지신(色供之臣)이었다. 즉, 운명적으로 왕을 색으로 섬겨야 하는 왕의 여자였..

읽고본느낌 2010.04.26

아픔이 아픔을 구원한다

집에서 놀다 보니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제는 공지영의 소설 을 읽었다. 이야기가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어불과 한나절이 안 걸려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아픔이 아픔을 구원한다'는 말이불현듯 떠올랐다. 이 책은 인간의 본질과 아픔에 대해서 많이 생각케 해 주는데,특히 주인공인 유정의 케릭터가 마음에 든다. 그녀는 잘 나가는 집안에서 자라 대학 교수가 되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다.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방황과 일탈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그녀가 사형수인 윤수를 만나면서 둘은 내적인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위로받으며 치유되어진다.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의 내면은 동정이나 연민 이상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그 아픔에 의한 동질감이 ..

읽고본느낌 2010.01.05

삶은 농담이다

방학이 되어 찾아온 자유시간이 감사하다. 느닷없이 받아든 선물에 어리둥절하는 아이처럼 아직도 들뜬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이 축복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마음은 여전히 설렌다. 매일 휴대폰 알람에 억지로 잠이 깨어 출근하고정해진 시간표대로 지내야 하는 일과에서 한 순간에 해방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몸과 마음이 적응하는데는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리라.지난 가을에 허리 쪽 돌발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히말라야로의 출발을 앞두고 있을 것이다. 내가 빠진트레킹 팀은 모레 안나푸르나로 출발한다. 덕분에 올 방학은 길고 온전한 휴식이 주어졌다.이 선물 보따리를 앞에 두고 가능하면 천천히 끈을 풀고 싶다. 어제는책장에서 오래된 소설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마침 손에 잡힌 것이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읽고본느낌 2009.12.30

열정의 습관

“섹스를 잘하는 남자와 하는 섹스죠. 여자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남자. 지식과 경험과 전술과 창조성이 풍부한 남자. 터부가 없는, 아주 자유롭고 성적 재능이 있고 대담하고 감각적인 남자와 하고 싶어요. 그에게도 성감대가 아주 풍부하다면 더욱 화려하겠죠.” “남자가 나를 함부로 대했으면 좋겠어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엉덩이를 때리고 몸을 묶은 뒤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체위를 구사하기를 바래요.” “한없이 오래 해보고 싶어요. 두 시간이나 세 시간쯤 계속. 어떤 상상의 힘도 빌리지 않고 완벽하고 감미로운 단계를 지나 오르가슴에 이르기까지 한순간도 그를 잊지 않고 의식하는 섹스. 그러니까 난 끝까지 사정하지 않는 남자를 기다려요.” “낯선 남자에게 반쯤, 거의 부드럽게 강간을 당하는 섹스를 원해요. ..

읽고본느낌 2009.12.28

정상적인 삶의 목록

‘슈퍼클래스’는 위너 중의 위너다. 그들은 돈과 권력을 함께 가지고 있다. 코엘료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무대 위에서 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지 결정하는 사람,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알기에 외모 따위엔 신경 쓸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만인의 선망을 받고 있다고 믿는 꼭두각시들의 줄을 당기는 사람, 그 줄을 어느 날 싹둑 잘라버려 꼭두각시들이 생명과 힘을 잃고 굴러 떨어지게 만드는 사람’이다. 코엘료의 신작 소설 ‘승자는 혼자다’[The Winner Stands Alone]는 그런 슈퍼클래스들과 슈퍼클래스의 명성과 권력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치 마약중독자들이 마약을 찾듯 그들은 오직 성공만을 위해..

읽고본느낌 2009.11.25

인생

최근에 중국 소설 세 권을 읽었다. 다이호우잉의 , 그리고 위화(余華)의 와 이었다. 다이호이잉이 문화대혁명이 지식인에게 준 상처를 그렸다면, 위화는 역사에 짓밟힌 민중의 아픔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을 읽는 동안 여러 대목에서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설은 푸구이라는 노인이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역정을 들려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푸구이는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가난뱅이가 된다. 고난의 삶은 재산뿐만 아니라 가족마저도 모두 앗아간다. 착하기만 한 아내 자전과 두 자녀 유칭과 펑샤, 사위인 얼시와 손자 쿠건이 각자 기막힌 사연들로 차례로 죽고 노인은 혼자 남는다. 푸구이의 삶은 국공내전과 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을 거치며 거친 역사의 물..

읽고본느낌 2008.10.21

현의 노래, 칼의 노래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와 '칼의 노래'를 읽었다. 미려한 문체로 소문난김훈의 글을 그동안은접하지를 못했는데, 이는 김훈에 대한 선입견도 한 원인이었다. 그분의 인터뷰를 기사나 TV로 보았을 때 지나치다 싶은 솔직성과 현실주의가 왠지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해석하는 그분의 견해가 옳다고 느껴지는 일면이 있지만 나에게는 부담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두 소설을 읽어보면서 김훈 특유의 글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바탕에 깔린 사상이랄까,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도공감되는 바가 많았다. 그것을 어떤 사람은 탐미적 허무주의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삶의 비극이랄까 눈물겨움 같은 것,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애상이 두 편의 소설에 공통적으로 녹아 있었다.낭만과 서정의 포장을..

읽고본느낌 2007.06.12

눈먼 자들의 도시

한 남자가 신호를 기다리는 차 안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눈이 먼다. 병원에 찾아가지만 그를 진료한 의사도 눈이 멀고, 눈 앞이 하얗게 변하는 백색실명증은 이렇게 도미노처럼 전 도시로 퍼져 나간다. 정부 당국은눈먼 사람들을 모아 수용소에 격리시킨다. 장님들만으로 살아야 하는 수용소 안은 식량 약탈이나 강간 등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드러나는 지옥으로 변한다. 힘 센 깡패 무리까지 생겨나 식량을 미끼로 금품을 착취하고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다. 그 와중에 오직 한 사람, 눈이 멀지 않은 의사 아내가 있다. 남편을 돌보기 위해눈이 먼 것으로 위장하고들어와서 이 모든 현상들을 지켜보며 눈먼 사람들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는다. 결국 수용소를 탈출하게 되는데 바깥 세상 또한 마찬가지로 변해 있었다. 모든 사람..

읽고본느낌 2005.12.18

소립자

오랜만에 소설을 한 권 읽었다. 미셀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이라는 프랑스 작가가 쓴 ‘소립자(Les Particules)'라는 책이다.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물리적 내용을 소재로 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20세기 서구 사회의 변화와 그 와중에 희생된 개인의 일생과 문명의 전환을 다룬 스케일이 큰 소설이다. 특이한 점은 포르노 수준의 적나라한 성 묘사가 가득해서 읽는 사람을 나른하고 어둡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책을 읽고나니 ‘소립자’라는 제목이 전혀 엉뚱한 것만도 아니었다. 사회 시스템 안에서 각 개인은 마치 소립자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소립자는 외부의 물리적 장(場)에 의해 영향을 받고 서로 간에 상호작용을 하는 독립적인 존재이다. 이 책..

읽고본느낌 2005.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