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26

양철북

개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건 흥미롭다. 10대는 한 인간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때이므로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 시절은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발견하면서 공감한다. 은 이산하 시인의 성장소설이다. 작가가 꿈인 고등학생 철북이 구도승인 법운스님과 전국을 순례하며 깨달음을 얻어가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몸으로 부딪치며 세상을 배운다. 구체적인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라 함께 지내고 얘기하며 자연스레 눈을 떠간다. 소설에서 철북이 스님과 나누는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고등학생의 지적 수준은 이미 뛰어넘었다. 작가를 꿈꾸는 소년의 엄청난 독서량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늘 선문답 같은 말이 ..

읽고본느낌 2016.08.22

채식주의자

유명 문학상을 받은 작품과 독자가 받는 감동이 비례하지는 않는다. 기대가 커서인지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럴 때는 전문가는 역시 보는 눈이 다르구나, 하고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올봄에 한강은 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 영미권에서는 꽤 권위 있는 상인 것 같다. 한국 작가가 세계적인 상을 받은 소식은 모두를 기쁘게 했다. 경제나 스포츠 분야에서의 성취에 비해 문학이나 사상 같은 정신적인 면에서는 많이 뒤처져 있었다. 수상을 반기는 건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는 수상 소식을 들은 뒤에 책을 사서 읽어 보았다. 그런데 느낌을 글로 옮기려니 굉장히 막막했다.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소설이 품고 있는 함의를 읽어내기가 내 수준으로는 어려웠다. 큰 상을 받은 작품을 내 멋대로 ..

읽고본느낌 2016.07.21

소금

박범신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구조를 드러내 보이겠다고 했지만, 이야기 전개가 부자연스러워 효과가 반감된다.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래도 이 소설 은 우리 시대와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준다. 자본주의는 빨대와 깔대기의 거대한 네트워크란 작가의 말에 동의하지만 아버지만 희생자라고 할 수도 없다. 피해자는 아버지를 포함한 체제 속의 모든 구성원들이다. 소설은 아버지를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선명우는 열심히 일해서 회사의 상무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가정에서 그의 자리는 없다. 아내와 세 딸의 화려한 소비를 뒷받침해주기 위한 돈 버는 로봇일 뿐이다. 별나긴 하지만 우리 시대 아버지의 표상으로 봐도 무난하다. 어느 날 선명우는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

읽고본느낌 2016.04.27

소설가의 일

김연수 작가의 소설 작법이다. 딱딱한 교재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수필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소설 쓰기만이 아니라 인생론이기도 하다. 글을 쓴다는 건 삶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쓰기에 관한 책이라는 걸 모른 채 읽었다. 서가에서 훑어볼 때는 소설가의 일상에 대한 산문이라고 생각했다. 소설가의 일상이 소설 쓰는 일일 테니 소설 작법에 관한 내용이어도 속은 것은 아니다. 이과 전공으로서 문학 원론에 관한 내용이 색다르고 흥미로웠다. 책 내용 중에서는 생각하지 않고 쓴다는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은이는 '감각으로 쓰고 생각하며 교정한다'고 말한다. 쓰기보다는 고치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구성을 완벽하게 결정해 놓고 소설 쓰기에 들어가는 줄 알았다. 한 번..

읽고본느낌 2016.02.28

디 마이너스

1990년대 후반의 대학 생활을 그린 손아람의 장편소설이다. 90년대 학번은 대학에서 마지막 운동권 세대라 할 수 있다. 전대협과 한총련으로 이어진 학생 운동 그룹은 NL과 PD 계열로 나누어지고 후반에는 연대회의와 전학협이 주도했다. 이 소설 는 연대회의에서 활동한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상과 갈등, 사랑, 대학 생활의 애환을 담고 있다.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면서 점차 힘이 떨어지는 게 아쉽다. 내 대학 시절과 비교하면 학생들의 의식에서 굉장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90년대는 제도적으로는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그래서 투쟁의 내용도 우리와는 달랐다. 정치적 이슈보다는 경제 불평등의 개선에 비중이 커졌다. 학생 운동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 뒤로 대학은 자본의 논리에..

읽고본느낌 2016.02.10

투명인간

소설을 읽으며 영화 '국제시장'과 내내 비교되었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얘기를 풀어가는 결은 다르다. 영화가 가족을 위해 고생하며 오늘의 풍요를 이룬 세대의 자부심을 그렸다면, 소설 은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 이런 관점의 영화가 제작되어 '국제시장'과 대비시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여러 화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주인공은 만수다. 부자였던 할아버지가 일제 때 독립운동과 연관되어 재산을 다 잃고 화전민이 사는 산골로 숨어든다. 아버지는 이런 할아버지가 못마땅해 글공부는 버리고 억척같이 땅을 일구며 가족을 부양한다. 만수는 육 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외모는 볼품없고 형제들 중 머리도 제일 나쁘지만 심성은 착하기 그지없다. 오직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읽고본느낌 2015.12.30

1Q84

1, 2권은 전에 읽었는데 한참 사이를 두고 이번에 3권을 마저 읽었다. 1권을 읽을 때의 긴장감은 덜했지만 하루키의 필력에는 여전히 감탄했다. 하루키는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위장에 문제가 있는 물리교사' 같은 표현에는 무릎을 쳤다. 워낙 문장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보여선지 내용이 받쳐주지 못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이다. 전체 분량이 2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데도 지루하지는 않다. 그러나 다 읽고 났는데도 선명하게 남는 건 없다. 이건 뭐지, 라는 어리둥절한 느낌이다. 작가의 속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겠다. 가볍게 생각하면 이렇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1Q84 세계를 산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새로운 눈이 떠지고 이후의 세계는 전과는 완전히 ..

읽고본느낌 2015.09.07

잠실동 사람들

서울 강남 엄마들의 극성스런 교육열을 다룬 정아은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재건축된 잠실 고층아파트에 살고 있는 상류층 주부들의 욕망을 펼쳐 보인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초등학생 학부모로 오직 일류 대학을 목표로 아이들을 닦달한다. 입시라는 전쟁터에서 아이들은 소모품일 뿐이다. 자아 반성이 없는 엄마의 탐욕 아래 아이들은 병들어간다. 부유한 잠실동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도 등장한다. 몸을 팔며 학비를 벌어야 하는 대학생 서영, 가짜 경력을 내세워 과외 교사를 하는 김승필, 학습지 교사나 가사 도우미들이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이다. 소설에는 악한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각자의 생활 양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일상이 문제다..

읽고본느낌 2015.06.11

나의 몫

이란의 여성 작가인 파리누쉬 사니이의 장편소설이다. 이슬람 문화권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IS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만행을 통해 단편적인 소식만 접할 뿐이다. 편견과 사실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이 소설을 읽었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근본 질문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슬람이라고 특별한 종교가 아니다. 사람살이는 어디나 마찬가지다.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 혁명 시기가 이 소설의 주 무대다. 종교의 권위가 강한 가부장적 가정에서 자란 마수메는 인간의 기본 감정마저 억압당한 채 강제 결혼을 당한다. 가정에 아무 관심도 없는 남편은 공산주의 혁명가다. 안으로는 자식을 챙기고, 밖으로는 자아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한 여인의 일생이 파란만장하게 그려진다. 이..

읽고본느낌 2015.05.11

청동정원

80학번 최영미 작가의 자전소설이다. 고3 입시 전쟁부터 서울대 입학, 운동권 활동, 사랑, 결혼, 이혼의 아픔, 그리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자유발랄한 영혼이 시대의 고뇌에 동참하고 방황하면서 자신의 꿈을 좇아 나가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생생하다. 책에 빠져 단번에 읽었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 내 청춘이 떠오른다. 시대는 달라도 누구나 비슷했을 것이다. 고민의 방향은 개인마다 달랐겠지만 시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젊음은 없었다. 그중에 일부는 운동에 뛰어들고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은 80년대 운동권의 모습을 사실대로 보여준다. 한 시대의 기록화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초 상황도 비슷했다. 박정희의 유신 통치가 시작되고 얼음왕국이 되었다. 학교에는 군대가 진주하고 문 닫는 날이 더..

읽고본느낌 2015.03.05

관촌수필

오래전에 읽다가 만 소설인데 이번에는 아주 재미있게 완독했다. 젊었을 때는 이런 소설 읽기가 힘들었는가 보다. 무엇이건 때가 무르익어야 자연스레 된다. 에는 고향의 정경과 인정이 토속어와 함께 생생하게 살아 있다. 문체에서도 고전적인 향취가 난다. 사라져 간 고향과 사람들을 이만큼 서정적으로 묘사한 글도 만나기 어렵다.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특히 충청도 지방의 사투리가 작품의 맛을 더한다. 자전적 소설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어휘를 구사하자면 많은 공부와 노력이 들었을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의 집은 한산 이씨의 잘 나가는 양반이었다. 증조부는 상주목사를 지냈다. 그러나 육이오 전쟁을 겪으면서 집은 풍비박산이 났고, 작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읽고본느낌 2015.01.12

높고 푸른 사다리

가톨릭 수도원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난 이런 종교소설이 좋다. 홀딱 빠져서 이틀 밤새에 다 읽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흥미 있는 소재일 수밖에 없고, 영혼의 고뇌나 신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는 고금을 불문하고 소설의 주제로 알맞다. 소설에서 감동적인 부분은 두 군데였다. 첫 번째는 토머스 수사가 죽음을 앞두고 요한 수사에게 유언처럼 전해주는 내용이다. 토머스 수사는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독일인으로 1941년에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원산 가까운 덕원에 소재한 수도원이었다.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고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당 치하에 남게 된다. 그리고 옥사덕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하며 신앙의 힘으로 버텨 낸다. 인간은 고난 앞에서 무릎 꿇..

읽고본느낌 2014.11.20

인간적이다

요사이는 짧고 가벼운 글을 주로 읽는다. 길고 무거운 주제는 감당하기 어렵다. 얼마 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를 인내심을 발휘해서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다. 무려 1천 페이지나 되는 대작이다. 호흡이 너무 느려서 이런 소설은 지금의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는 소설가 성석제의 짧은 이야기집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한 편이 서너 장 정도밖에 안 되니 콩트에 가깝다. 굳이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고등학교 때 배운 용어로 장편소설(掌篇小說)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장에서 팝콘을 먹듯 즐겁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서 짧은 글 속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만나는 것 같다. 소설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일상의 사건들이 모여 소설가의 부엌에서 맛난 음식으로..

읽고본느낌 2014.11.08

사람의 맨발

한승원 작가의 장편소설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렸다. 세상 부조리에 대한 싯다르타의 고뇌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출가에 초점을 두었다. 소설은 싯다르타가 열반한 뒤 스승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카사파에서 시작된다. 카사파가 슬퍼하고 있을 때 관이 터지며 싯다르타의 발이 밖으로 뻗어 나온다. 싯다르타의 두 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난 출가자의 표상이다. 싯다르타가 두 발을 카사파에게 보인 것은 만천하의 인민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기 위하여 험한 길을 걸어다닌 맨발의 의미를 잊지 말라는 당부인 것이다. 싯다르타는 사카 왕국의 임금으로 인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다. 카스트 신분 제도를 신의 뜻이라며 강요하고 인간을 속박하는 계급사회를 싯다르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모두가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

읽고본느낌 2014.07.21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딸네 집에 갔다가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을 펴고는 단숨에 읽었다. 돋보기를 가져가지 않아 침침한 눈이었지만 한 번 빠져드니 헤어나지 못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는 돈과 외모지상주의에 맹종하는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 시스템을 고발한다.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를 지배하는 전략이 부와 아름다움에 대한 신화를 부풀리는 것이다. 돈과 예쁜 여자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대중은 부나비처럼 부와 아름다움을 향한 경쟁 대열에 뛰어든다. 소수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다. 가혹한 세상에 들러리를 선 시녀의 처지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여자는 놀림을 받고, 소외되..

읽고본느낌 2014.03.25

1984

젊었을 때 읽은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1984년이 다가올 미래였지만, 지금은 지나간 과거다. 소설에서 그린 것과 같은 1984년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래에 대해 자꾸 비관적이 되는 건 왜일까? 시절이 더 수상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어 세상을 더 사실적으로 보게 된 탓일까? 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개인의 마음까지 당이 장악한다.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세 초강대국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계급사회다. 오세아니아는 맨 꼭대기에 빅 브라더가 있고, 그 밑에 당원이 있으며, 하층의 노동자 계급으로 되어 있다. 세 나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지만 이는 공포를 조성하여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주민을 통제하기 위해 과거를 조작하고, 아예 인간성을..

읽고본느낌 2013.11.26

난설헌

너무 영민하고 너무 감성적이어서 시대와 불화했던 여인 허초희(許楚姬, 1563~1589), 스스로 지은 난설헌(蘭雪軒)이라는 호 그대로 그녀는 눈 속에 핀 한 송이 난초였다. 부모와 형제의 사랑을 받으며 자유로운 가풍에서 성장한 그녀는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웠고, 여덟 살 때 '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일찍이 천재성을 보였다. 그러나 열다섯 살 때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혼인하면서 시어머니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로 삶이 삐걱댔다. 더구나 제 손으로 키워보지도 못한 어린 두 자식을 일찍 여의고 나서는 생의 의욕마저 상실했다. 문학에의 열정도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고,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불행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은 최문희 작가가 쓴 허난설헌의 일대기로 혼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난..

읽고본느낌 2013.10.25

두근두근 내 인생

창비에서 펴낸 젊은 작가의 소설을 두 권 읽었다. 김애란의 과 김학찬의 였다. 둘 다 30대 초반의 작가답게 신선하고 경쾌하며 재미가 있었다. 은 조로증에 걸린 열일곱 살 소년의 마지막 1년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열일곱이지만 육체 나이는 여든을 넘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병에 시달리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산 소년은 책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찾아낸다. 두근거리는 사랑도 경험한다. 무거운 주제일 수 있지만 극한 상황에서도 빛나는 인간성이 젊은 작가의 손에 의해 아름답게 그려졌다. 는 붕어빵 명인인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가려는 스물아홉 청년의 독특한 이야기다. 그는 일본에까지 가서 타꼬야끼를 굽는 비법을 전수받고 온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갈등, 불안한 젊은 세대의 고민 등이 함께 그려진다..

읽고본느낌 2013.09.22

원미동 사람들

이 소설이 처음 나온 게 1987년이었으니 벌써 26년이나 되었다. 그때는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읽어보지를 못했고, 세상이 세 번이나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흘러서야 인연이 맺어졌다. 숲에서는 숲을 볼 수 없듯이 이렇게 좀 떨어져서 80년대를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싶다. 양귀자의 은 2년에 걸쳐 문학잡지에 연재된 11개의 소설로 된 연작집이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 부천 원미동(遠美洞)에서 작가 자신이 살면서 동병상련한 이웃 이야기를 그렸다. 개발시대를 대표하는 원미동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동네였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인간을 얼마나 피폐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침통한 심정과 분노에 가까운 감정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원미동 사람들에게 삶은 살아내..

읽고본느낌 2013.07.25

백년 동안의 고독

장맛비를 벗삼아 읽었다. 은 콜롬비아 작가인 마르케스(G. G. Marquez)의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소설은 마콘도에서 살아가는 5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에 관한 이야기다. 선조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마콘도 마을을 건설했을 때는 에덴동산이 연상될 정도로 낙원이었다. 그러나 집시들이 찾아와 문명 세계의 신기한 물건을 보여주면서부터 마을은 변해 간다. 부화뇌동하는 주민들은 변화의 흐름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 현대적 행정 조직과 철도가 들어오고 미국인은 바나나 농장을 지어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을은 몰락하고 부엔디아 가문의 맨 마지막 후예가 끝을 목도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맺는다. 마콘도는 콜롬비아에 있는 작은 마을이 아니라 현대화 과정을 밟아가는 모든 공..

읽고본느낌 2013.07.11

이방인

카뮈의 이 소설을 다시 읽어 보았다. 아니, 처음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전이란 무엇인가? 읽지 않았으면서도 읽은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는 책이다. 도 그런 류다. 읽은 기억은 전혀 나지 않은데 응당 읽었을 것 같은 책이다. 역시 혼란스럽다.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 존재를 '피투(被投)'라는 말로 설명한 게 떠오른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내던져진 존재다. 또 세상은 내 뜻과는 아무 상관 없이 돌아간다. 뫼르소는 그런 상황을 극단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건 아닐까? 뫼르소가 보인 세상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은 피투된 존재의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은 세상과 삶의 본질을 까발린다. 눈부신 알제리의 햇빛 아래 가식으로 덮인 일반적인..

읽고본느낌 2013.06.18

소설 공자

는 최인호 작가의 근작 장편소설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료에 근거하여 공자의 삶을 재구성했다. 공자의 출국과 주유천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가 오늘과 별로 다르지 않다. 2천 년 전 예수가 살았던 유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성인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되는 책이다. 책에는 공자 외에 노자와 장자, 예수 이야기도 나온다. 공자의 사상과 비교하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유가와 도가의 차이를 좀더 명료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차이가 그분들의 삶에서도 완연히 드러난다. 노자는 세상에 알려지자 함곡관을 통해 사라졌지만, 공자는 끝없이 세상과 권력을 찾아 들어간다.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시밭길을 가는 것이다..

읽고본느낌 2012.08.28

악의 심연

더위를 잊기 위해 스릴러 소설을 골랐다. 막심 샤탕의 이다. 이틀에 걸쳐 읽었는데 어젯밤에는 무서워서 문을 꽁꽁 잠그고 잤다. 더위를 잊으려다 도리어 더위를 더 맞이한 셈이 되었다. 소설에는 인육을 먹는 등 너무 잔혹한 장면이 나온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뒷 느낌이 꺼림찍하다. 아무래도 책을 잘못 골랐다. 그러면서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 둘 수 있다. 스릴러의 매력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타인의 비극을 엿보려는 심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호기심으로 손가락 사이를 살며시 연다. 머리가죽이 벗겨진 여자가 뉴욕의 공원을 발가벗고 도망가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예순일곱 명의 실종사건이 드러나고 범인들의 윤곽이..

읽고본느낌 2012.08.08

마교사전

문화대혁명 시기에 지식 청년 한소공(韓少功)은 산간오지인 마교로 하방되어 강제 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낯설고 물 선 그곳에서의 경험이 뒤에 (馬橋詞典)이라는 소설로 태어났다. 이 소설은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마교 사람들이 쓰던 115 개의 단어를 중심으로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마교는 현대문명과는 단절된 산골의 작은 촌락이다. 소설에는 문명으로 오염되기 이전의 인간 본연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 소설은 주된 줄거리가 있는 전통적인 형식을 떠나 모든 사건들이 병렬적으로 전개된다.우리 삶은 여러 개의 인과의 실마리가 교차하는 가운데 꾸려지고 있다. 전통적인 소설의 방식은 주된 줄거리가 작자와 독자의 시야를 독점함으로써 주변을 돌아볼 수 없게 하는 단점이 있다. 작가가 ..

읽고본느낌 2011.05.21

강남몽

박선녀,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났으나 여상에 다닐 때 예쁜 외모와 몸매로 우연히 모델로 발탁된다. 그녀는 룸살롱 종업원을 거쳐 마담이 되고 강남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하며 돈을 많이 번다. 그녀가 만났던 세도가들의 도움이 컸다. 나중에는 대기업 회장의 세컨드가 되어 최상류 계층으로 뛰어오르고, 강남의 백 평 빌라에서 딸과 함께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 1995년 그날, 남편의 소유였던 삼풍백화점에 들렀던 그녀는 건물이 붕괴되면서 매몰된다. 임정아도 시멘트 더미 사이에 갇혔다. 그녀 역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삼풍백화점 지하 일층 아동복점 매장에서 근무했다. 그녀의 부모는 시골에서 상경하여 구로동 봉제공장에서 일하다가 결혼했고 도시 개발로 변두리로 밀려나며 가난하게 살았다. 동생은 다리를 못 쓰는 장애를 가졌다..

읽고본느낌 2011.03.08

내 젊은 날의 숲

동료가 이 책을 선물했다. 김훈 얘기를 몇 차례 했더니 내가 김훈의 애독자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김훈의 문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수식이 배제된 건조한 단문이 그분 글의 매력이다. 은 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립수목원에 계약직으로 취직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민통선 안의 격리된 수목원에서 꽃과 나무의 세밀화를 그리는 일을 한다. 그녀의 삶은 단조롭고 드라이하다. 격렬한 감정의 충돌도 없고 열정적인 사랑도 없다. 몇몇 등장인물들과 유해발굴단의 유골 묘사를 통해 인생의 쓸쓸함과 무의미성이 그려지고 있다. 김훈의 소설에 공통되는 산다는 것의 막막함이 조금 스타일을 달리 하지만 이번 책에서도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은 6.25 때의 전사자 유골발굴단 작업에 참여한다. 발굴 현장의 유골을 세밀화로 그리..

읽고본느낌 2011.01.19

공무도하

간결한 문체 때문에 김훈의 글에 끌린다. 그분의 글은 짧고 건조하다. 살이 붙어있지 않은 생선 가시 같다. 감정의 낭비가 심한 글보다 이런 드라이한 글이 마음에 든다. 이런 문체는 삶의 비애를 드러내는데 알맞다. 그분은 늘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에 대해 말한다. 일상은 비루하고 치사하다. 부조리하고 희망 없는 세계를냉혹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묘사한다. 세상의 치부는 숨을 데가 없다. 에서 가야의 순장 장면과 백제군의 집단 처형 장면은 나로서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비극을 그릴 때 김훈 문체의 진가가 드러난다. 이번에 를 읽은 것은김훈 문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다. 소설에는 비극적 인물 군상들이 병렬로 등장한다. 개에게 물려죽은 판잣집 아이, 누이를 강간하는 아비를 죽인 청년, 크레인에 깔려죽은 여고생, ..

읽고본느낌 2010.09.24

미실

‘그녀의 치마가 펄럭였을 때 세상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김별아의 장편소설 을 읽었다. 에 기록되어 있다는 ‘미실(美室)’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소설 내용으로 보면 무척 독특했던 여성이었던 것 같다. 미실은 자신만이 가진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활용해서 임금을 비롯한 뭇 남성들을 손아귀에 쥐고 정치적 야망을 이룬 스케일이 큰 여자였다. 그녀는 총명하고 명민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교활했다. 그녀는 남자들의 심리를 기막히게 파악하고 있었다. 한번 관계를 맺으면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성들의 로망이었지만 동시에 팜므 파탈이기도 했다. 미실은 대원신통이라는 핏줄을 가진 색공지신(色供之臣)이었다. 즉, 운명적으로 왕을 색으로 섬겨야 하는 왕의 여자였..

읽고본느낌 2010.04.26

아픔이 아픔을 구원한다

집에서 놀다 보니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제는 공지영의 소설 을 읽었다. 이야기가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어불과 한나절이 안 걸려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아픔이 아픔을 구원한다'는 말이불현듯 떠올랐다. 이 책은 인간의 본질과 아픔에 대해서 많이 생각케 해 주는데,특히 주인공인 유정의 케릭터가 마음에 든다. 그녀는 잘 나가는 집안에서 자라 대학 교수가 되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다.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방황과 일탈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그녀가 사형수인 윤수를 만나면서 둘은 내적인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위로받으며 치유되어진다.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의 내면은 동정이나 연민 이상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그 아픔에 의한 동질감이 ..

읽고본느낌 2010.01.05

삶은 농담이다

방학이 되어 찾아온 자유시간이 감사하다. 느닷없이 받아든 선물에 어리둥절하는 아이처럼 아직도 들뜬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이 축복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마음은 여전히 설렌다. 매일 휴대폰 알람에 억지로 잠이 깨어 출근하고정해진 시간표대로 지내야 하는 일과에서 한 순간에 해방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몸과 마음이 적응하는데는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리라.지난 가을에 허리 쪽 돌발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히말라야로의 출발을 앞두고 있을 것이다. 내가 빠진트레킹 팀은 모레 안나푸르나로 출발한다. 덕분에 올 방학은 길고 온전한 휴식이 주어졌다.이 선물 보따리를 앞에 두고 가능하면 천천히 끈을 풀고 싶다. 어제는책장에서 오래된 소설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마침 손에 잡힌 것이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읽고본느낌 2009.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