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엄마들의 극성스런 교육열을 다룬 정아은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재건축된 잠실 고층아파트에 살고 있는 상류층 주부들의 욕망을 펼쳐 보인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초등학생 학부모로 오직 일류 대학을 목표로 아이들을 닦달한다. 입시라는 전쟁터에서 아이들은 소모품일 뿐이다. 자아 반성이 없는 엄마의 탐욕 아래 아이들은 병들어간다.
부유한 잠실동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도 등장한다. 몸을 팔며 학비를 벌어야 하는 대학생 서영, 가짜 경력을 내세워 과외 교사를 하는 김승필, 학습지 교사나 가사 도우미들이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이다. 소설에는 악한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각자의 생활 양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일상이 문제다. 문제의 핵심에는 구린내 나는 이기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 초등학교 교사인 김미하가 있다. 원칙대로 학급 운영을 하다가 학부모의 원성을 듣고 급기야 아이들 등교 거부 사태까지 이른다. 돈 많은 학부모의 비위를 맞출 줄 몰랐던 것이다. 교사의 신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그녀는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면서 교사 생활이 마감된다. 이 장면을 읽으며 과거 선생을 할 때 몇 가지 추억이 떠올랐다.
1990년대 초에 나는 강남에 있는 K 고등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서로 담임을 하려고 싸움을 하는 학교였다. 학부모가 거둬주는 촌지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촌지가 암묵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대신에 담임 스트레스는 엄청나서 내가 있는 동안에만도 여러 명이 중병에 걸리거나 목숨을 잃었다.
내 나이 또래의 동료 교사 한 명도 그렇게 세상을 떴다. 학부모의 등쌀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부모는 담임 때문에 아이가 정신 이상이 되었다고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교문 앞에서 몇 달간 했다. 심지어는 밤에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얌전했던 그는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은 암 판정을 받았다.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쓸쓸하게 미소 짓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 뒤로는 만나주지를 않더니 얼마 되지 않아 저세상으로 갔다.
잘 사는 부류들의 오만과 뻔뻔함, 이기심을 나는 그 학교에서 절감했다. 부모를 닮아선지 아이들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담임을 맡았다가 나는 질겁을 했다. 스트레스로 몸이 망가지는 게 매일 느껴졌다. 만약 한 해만 더 그 짓을 했더라면 나도 동료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 이래서 부자가 되는구나, 라는 편견일지 모르는 생각을 그때부터 갖게 되었다.
<잠실동 사람들>에서 강남 학부모의 욕망을 다시 접한다. 내가 경험했던 20년 전보다 지금은 더 심화되어 있는지 모른다. 황폐해진 교실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류 대학과 성적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아이들의 심성은 더 병들어 갈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부모의 고민이 없다면 한국의 미래도 없다. 아이들을 학대한 과보를 기필코 받게 될 것이다.
소설 마지막에는 애틋한 장면이 나온다. 초등학생 지환이는 다친 비둘기를 서랍 속에 감추고 개인 과외 교습을 받는다. 비둘기가 깨어서 퍼드득 소리를 내고, 살아난 비둘기를 지환이는 가슴에 안는다. "우아, 따뜻하다!" 그러나 선생은 기겁을 하며 말한다. "그거 빨리 치워." "선생님, 이건 그냥 새예요." 상처 입은 비둘기는 바로 우리 아이들에 다름 아니다. 얼마큼 시간이 흘러야 우리는 이 탐욕의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지금으로써는 아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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