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세월호를 기록하다

샌. 2015. 5. 20. 16:43

낡은 배가 도입되도록 선령 규제를 완화하지 않았더라면

청해진해운이 무리한 증개축을 하지 않았다면

화물 적재 기준에 따라 화물을 실었다면

위험한 출항을 거부할 수 있도록 선원들에게 발언권이 있었다면

운항 관리자가 규정대로 출항을 통제했더라면

평형수가 좀 더 채워지고 화물이 단단히 고박되었다면

조타수가 대각도 조타를 하지 않았다면

배가 쓰러진 뒤 선원들이 현명하게 대처했더라면

비상시 선내 방송 매뉴얼이 갖춰져 있었다면

진도VTS가 퇴선 결정의 책임을 세월호에 맡길 게 아니라 직접 지시했더라면

구조 세력들이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협력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면

출동한 123정 해경이 더 적극적이고 판단력이 뛰어났더라면

 

뒤돌아보면 아쉬운 게 한둘이 아니다. 300명이 넘는 생때같은 목숨이 수장된 세월호 참사는 우리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린 학생들에게 1시간 넘게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고 해 놓고는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침몰하는 배를 남겨두고 도망쳤다. 사고의 진상 규명 작업은 아직 시작도 안 되고 있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는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의 일원인 오준호 씨가 세월호 재판 기록을 중심으로 사고의 진실을 추적한 책이다. 그날 그 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 모든 공판을 방청하고, 유가족을 만나고,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객관적인 눈으로 사고를 재구성했다.

 

재판정은 급격한 변침을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항해사나 조타수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어쨌든 세월호는 급선회를 했다.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복원력을 잃은 배는 기울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사고는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사고에 대처하는 과정을 보면 어쩌면 이럴 수도 있나 싶게 통탄스럽다.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이 현명하게 행동했다면 희생자를 거의 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장은 승객을 객실에 가둬 놓고 혼자 빠져나갔다.

 

사고가 난 후 운항을 맡던 여자 항해사는 울고만 있었고, 선장은 놀라서 쪼그려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지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세월호는 아무 판단도 내리지 못한 채 귀중한 시간만 허비했다. 기관실 선원들은 따로 모여 도망갈 궁리만 했고, 여객 담당은 동분서주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만약 초기에 객실 밖으로 대피하라는 방송만 했어도 엄청난 희생은 막을 수 있었다. 그게 안타깝다. 위험하니 객실에 대기하라는 지시를 그대로 따른 어린 학생들이 차오르는 물에 잠기며 맞은 마지막은 어땠을까. 내 가슴이 막히는데 부모라면 어떻겠는가. 세월호는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다. 구할 수 있던 생목숨을 수장시킨 살인행위다.

 

유가족이 철저한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건 마땅한 일이다. 너무나 억울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것은 사고에 대한 법리적인 해석이므로 한계가 있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실은 반드시 밝혀야 한다. 유가족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과 다음 세대를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무능한 정부, 이익만 추구하는 기업, 구조적 부정의에 동조하는 개인, 무책임한 선원, 이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이다.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우리의 민낯이 세월호를 통해 그대로 드러났다. 이 시스템에서 안락하게 살고 있다는 자체가 악을 방조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 규명 이상으로 중요한 건 이 사회를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월호가 잊혀진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지은이는 바른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업의 이익보다 시민의 생명, 안전, 인권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노동자와 약자의 발언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고립된 자기 계발보다 동료 시민에 대한 연대를 추구하는 민주주의, 그리하여 국가가 시민을 두려워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강한 민주주의이며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회이고 이 슬픈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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