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14

국수

김숨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국수'를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소설의 분위기는 무겁고 납덩이가 얹힌 듯 가슴을 짓누른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심정은 어떠할까. 표제작인 '국수'는 죽음을 앞둔 새어머니에게 따끈한 국수를 대접하기 위해 조리를 하면서 새어머니와 마음으로 대화하고 화해하는 소설이다.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난 여인이 새어머니로 들어오는데 첫날 새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국수를 끓여준다. 새어머니를 차갑게 대한 주인공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모성이 품고 지켜야 하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 공감한다. 냉혹한 현실을 그린 작가의 소설에서 그나마 이 소설이 따스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한다. 제일 흥미롭게 읽은 소설은 '아..

읽고본느낌 2022.01.22

에브리맨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한 줄이다. 작가가 인간의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병과 죽음을 자연의 순리라 여기는 동양의 사고방식과 다르다. 그것은 배척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현대 의료가 병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과 비슷하다. 은 미국 작가인 필립 로스(Philip Roth)가 쓴 장편소설이다. 에브리맨(Everyman)은 '모든 사람', 또는 '보통 사람'이란 뜻이다. 소설 주인공은 이름 대신 '그'라는 호칭으로 쓰인다. '그'는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그'라는 한 인간이 늙고 병들어서 죽는 이야기다. 중간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삽입되지만 그것 또한 병이나 죽음과 연관..

읽고본느낌 2021.12.26

푸르른 틈새

권여선 작가의 장편소설로 1996년에 발표한 작가의 데뷔작이다. 일종의 성장소설로 작가의 10대, 20대, 30대의 삶이 교차하며 그려진다. 어느 작가나 첫 작품은 이야기 전개나 구성이 미흡할지라도 풋풋한 느낌이 들어 좋다. 더구나 성장소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작가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다.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젊은 시절로 함께 추억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에서 작가는 손미옥으로 나온다. 서른한 살의 미옥은 눅눅한 단칸 지하방에서 이사를 가려고 한다. 이사는 한 삶의 종착이면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이사를 가기 일주일 전부터 짐을 정리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소녀와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가 교대로 나오면서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누구나 성장통을 겪으며 커간다...

읽고본느낌 2021.10.29

아직 멀었다는 말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모르는 영역' 등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 작가의 글을 읽으면 사람살이의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책의 단편들도 모두 그런 범주에 들어 있다. 작가는 아프지만 세상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폭력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가련하고 쓸쓸한 존재들이다. 누구는 아빠 찬스로 50억을 받고 떵떵거리는데, 다른 누구는 노동 현장에서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간다. 이 세상은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 그런 점이 이 단편집의 제목에 '아직 멀었다'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손톱'이라는 소설에 '아직 멀었다'라는 말이 스쳐가듯 나온다. 소희는 엄마와 언니가 집을 나가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처녀다. 손톱을 다쳐 빠지게 되었는데도 ..

읽고본느낌 2021.10.20

한국이 싫어서

한국이 싫어서 호주 이주를 택한 한 젊은이의 이야기다. 호주 시민권을 얻기까지의 6년의 과정이 한국과 호주 생활을 대비하며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낸 장강명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이렇게 항변하는 주인공 계나는 자신을 톰슨가젤에 비유한다. 톰슨가젤은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서 사자한테 늘 잡아먹히는 동물이다. 사자가 다가올 때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가 있는데 자신이 꼭 그 꼴이었다는 것이다. 계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금융회사에 취직해 직장인이 되지만 살벌한 경쟁 사회..

읽고본느낌 2021.10.09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작가가 북한에서의 시인 백석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에서는 본명인 백기행으로 나온다. 해방 뒤 북한에 남은 백석은 전쟁을 거치고 숙청의 파도에서 살아남아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일곱 해'란 백석이 동시를 쓰기 시작한 1956년부터 삼수에 있는 관평협동조합으로 추방되어 완전히 절필하게 된 1962년까지를 말한다. 백석의 북한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으므로 은 많은 부분이 작가의 상상으로 그려져 있다. 전쟁 뒤 북쪽은 김일성의 유일사상만 통하던 통제된 사회였다. 문학도 혁명의 도구일 뿐이어서 백석 같이 감성이 풍부한 순수시를 썼다가는 반동분자로 몰리는 세상이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백석은 옛 시를 잊고 혁명과 증오를 부추기는 동시를 써야 했다. 백석이 그때 쓴 동시를 보면 ..

읽고본느낌 2021.06.01

정약용의 여인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한 여인의 시중을 받았고 딸까지 낳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여인의 이름은 진솔이고 딸은 홍임이다. 다산이 18년 간의 유배를 마치고 마재로 돌아올 때 진솔과 홍임도 동행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불명확하지만 다산에게 소실이 있었다고 해서 그분의 학문이나 인격에 흠이 되지는 않을 텐데, 후학들이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쉬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에 흥미를 느끼던 차에 찾아본 책이 최문희 작가의 소설 이다. 소설에는 다산의 유배 생활을 중심으로 부인인 혜완(惠婉), 그리고 유배지에서 만난 진솔과 홍임의 이야기가 얽혀서 나온다. 혜완은 명문가의 따님으로 다산보다 한 살 위였다. 혜완은 선비집 안방마님으로서의 위엄..

읽고본느낌 2021.05.09

다읽(10) - 좀머씨 이야기

20년 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좀머씨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무작정 걸어야 하는 좀머씨에 연민을 느끼면서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좀머씨의 외침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만큼 절박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때 내 마음 상태가 좀머씨와 닮은 바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따스한 손길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읽는 는 좀머씨 개인의 불행보다는 한 소년의 성장소설로서 더 비중 있게 읽힌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할까, 따스하게 읽힌 이야기였다. 특히 화자와 관련된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재미있고 공감이 되었다. 두 개의 에피소드는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카롤리나와, 미스 풍켈이라는 피아노 선생님에 관계된 일화다. 둘 다 어떤 상실감과 관련되어 있다. 잔뜩 기대했던 카롤리나와의 만남이 깨진 허전함, 그..

읽고본느낌 2021.05.05

나라 없는 나라

전봉준과 대원군의 밀회로 소설은 시작한다. 둘의 속은 달라도 상대가 가지고 있는 명분이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에서부터 전봉준이 체포되던 마지막까지를 다룬다. 이광재 작가가 썼고, 혼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19세기 후반부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불만과 요구가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동시에 외세는 호시탐탐 조선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나라의 중심을 잡을 힘 있는 세력은 없었다. 도리어 일본이나 청나라에 의존함으로써 한 줌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전봉준과 대원군이 암묵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1894년 3월에 고부 백산에서 1차로 봉기할 때 동학농민군은 네 가지 강령을 만들었다. ..

읽고본느낌 2021.01.29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문명과 야만의 충돌과 이에 저항하는 생명의 힘에 대해 썼다고 말했다. 소설의 무대는 대륙의 넓은 땅인데 동서로 흐르는 나하(奈河)를 경계로 북쪽의 초(草)와 남쪽의 단(旦) 두 나라로 나누어져 있다. 초는 유목민족이고 단은 농경민족인데, 초가 단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두 나라에 얽힌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작가가 지어낸 것이다. 역사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다. 때도 역사 기록 이전의 아득한 옛날이다. 사람과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말이다. 야백(夜白)과 토하(吐霞)라는 두 말인데 전쟁터를 누비며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만 결국에는 야생 상태의 말의 길을 찾아간다. 야백이 스스로 이빨을 빼서 재갈을 벗는 장면은..

읽고본느낌 2020.12.22

철도원 삼대

삼대로 이어진 철도원의 삶을 그린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가 1989년 방북 때 평양에서 만난 어느 노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이 철도원 삼대이고, 그 아랫대인 굴뚝 농성을 하는 이진오 이야기가 현재 시제로 교차한다. 실제로는 사대에 걸친 노동자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는 노동소설을 써보고 싶었다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밝힌다. 황석영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 같다. 는 이진오의 농성 투쟁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작가의 현란한 글솜씨에 빨려 들어간다. 6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지루할 틈 없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특히 주안댁과 신금이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안방에서 듣는 민담 같은 내용이라 정감이 간다. 이 소설..

읽고본느낌 2020.12.11

먼 바다

공지영 작가의 장편소설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첫사랑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여교수인 미호는 SNS를 통해 연락이 닿은 요셉을 미국 여행길에 뉴욕에서 만난다. 40년 전 그들은 여고생과 신학생으로 성당에서 만난 첫사랑이었다.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은 헤어진다. 그건 오해였을 거야, 라는 아쉬움과 함께 첫사랑은 오래 기억된다. 미호가 첫사랑을 만나려는 것은 가슴 속 응어리를 풀고 싶은 바람이 있었는지 모른다. 을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아픔도 있겠지만 추억하는 첫사랑은 아련하면서 달콤하다. 그러나 첫사랑과의 재회가 꼭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손에 들고 무수히 망설이다가 결국은 포기했던 적이 있다. 만약 지금 다시 기회가 주..

읽고본느낌 2020.12.05

빛의 과거

오랜만에 나온 은희경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자전소설에 장기가 있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과거를 재현한다. 이 소설은 1977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시작한 기숙사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도 같은 7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므로 비슷한 시대 환경을 경험했다. 그래서 더욱 공감할 수 있었고, 그 시절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은희경 작가의 문장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듯 감칠맛이 난다. 감성적인 여성 작가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권의 책을 단 한 차례도 지루하지 않게 읽기가 드문 데 작가의 글은 그렇지 않다. 빨리 끝날까 봐 두려울 정도로 이야기에 빠져드는 마력이 있다. 그중에서 작가가 사랑에 빠졌을 때를 묘사한 아름다운 부분은 이렇다. 1977년의 6월과 7월은 일생에서 내가 가장..

읽고본느낌 2020.11.30

7년의 밤

정유정 작가의 스릴러 소설이다. 여성작가라는 선입견을 씻어줄 정도로 스케일이 크고 선이 굵다. 그러면서 상황이나 인간 내면의 심리 묘사는 아기자기하며 세밀하다. 불의의 사고로 낭떠러지로 내몰린 뒤 아들을 지키려는 남자(최현수)와, 딸의 복수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는 다른 남자(오영제)의 대결 이야기가 숨 막히게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광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부각하는데 범죄와 폭력 스토리는 빠질 수 없다. 작가가 이런 소설을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모두 개성이 뚜렷하다. 그중에서 제일 주목된 인물은 오영제다. 내가 아는 싸이코패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싸이코패스는 자기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특징이다. 자기 물건을 부순 고양이를 ..

읽고본느낌 2020.05.24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진작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이제야 읽어본다. 가벼운 단편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긴 장편소설이다. 분량이 5백 페이지가 넘는다.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의 국민작가이고, 그의 대표작이 이 소설이라고 해서 기대가 있었는데 책을 읽고 난 느낌은 좀 실망이다. 장편으로 담기에는 지리해질 위험이 있는 이야기다. 라는 제목 그대로 고양이의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본 2년의 기록이다. 여기 등장하는 고양이는 사람의 말만 못 할 뿐 지력은 인간 이상이다. 주인공인 구샤미와 친구들이 고양이의 관심 대상이다. 고양이를 통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알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생각이 고양이를 통해 드러난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05년은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때였다. 그만큼 ..

읽고본느낌 2020.05.02

나는 농담이다

우주를 소재로 사용한 게 흥미롭다. 책 표지에도 우주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서가에서 책을 뽑을 때 표지 그림이 이 책을 선택하게 했다. SF가 아닌 소설에서 우주가 등장하는 것은 드물다. 는 초기 화성 탐사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김중혁 작가의 소설이다. 송우영과 이일영이라는 두 남자가 주인공이다. 송우영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인데 어머니가 죽으면서 남긴 편지를 주인(이일영)에게 돌려주려 한다. 이일영은 사고로 우주 미아가 된 상태다. 통신이 두절되고 산소가 점점 희박해져 가는 가운데 관제센터를 향해 메시지를 남긴다. 송우영과 이일영은 어머니가 같지만 아버지는 다른 형제다. 는 싱겁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등장하는 인물도 희한하다고 해야 할까, 뚜렷한 색깔이나 개성이 없이 흐릿하다. 이 소설이 말하려는 바도 마..

읽고본느낌 2020.04.15

'보리'라는 이름을 가진 개의 눈을 통해 인간과 인간 세상을 얘기하는 김훈 작가의 소설이다. 보리의 주인은 댐 건설로 집이 물에 잠기게 되어 고향을 떠나는 수몰민 가족이다. 어촌에 터를 잡았지만 고기잡이하던 가장이 죽자 다시 외지로 내쫓기듯 떠난다. 이 책의 부제는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다. 인간이나 개나 생명 가진 것이 살아가는 고단한 숙명이 안타깝게 그려진다. 나는 개를 싫어한다. 밖에서 어쩌다 개를 만나면, 개 역시 그런 나를 아는지 유난히 나만 보면 경계하면서 캉캉 짖어댄다. 누가 자기에게 적대적인지 눈치 하나는 빠른 것 같다. 에 나오는 보리는 인간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웬만큼은 알아챈다. 보리에 비라면 오히려 인간의 개에 대한 몰이해가 깊다. 작가는 세상의 개를 대신해서 짖는다고 했다...

읽고본느낌 2020.03.18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를 비롯해 일곱 편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두 편은 전에 어딘가에서 읽어본 작품이다. 작가는 인간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시니컬하게 드러낸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가면을 벗기는 솜씨가 탁월하다. 작품의 분위기는 쓸쓸할 수밖에 없다. 건조하고 까칠한 세상을 작가는 차분하면서 냉정하게 그려낸다. "미소 없이 상냥하고 서늘하게 예의 바른 위선의 세계. 무서운 것도, 어색한 것도, 간절한 것도 '없어 보이는' 삶에 질기게 엮인 이 멋없는 생활들에 대하여." 책 뒷면에 적힌 이 문장이 작가가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잘 말해준다. 우리는 상냥하게 악수를 하지만 손에는 칼을 품고 있다. 상처가 아물 날이 없이 또 다른 손을 맞잡으며 살아간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

읽고본느낌 2020.03.02

흑산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1800년 전후 시기의 천주교 박해가 중심 이야기다. 당시의 부패한 정치와 피폐한 백성의 삶이 바탕에 깔려 있다. 무겁게 읽히는 책이다. 시대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스려져 간 인간의 고통과 눈물이 김훈 작가 특유의 문체로 잘 그려져 있다. 이라는 제목만 보면 정약전이 주인공인 것 같은데, 이 책에는 뚜렷한 주인공이 없다. 정약전이 등장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정약전과 황사영을 중심으로 이들과 관계된 다수의 인물이 모두 주인공이다. 황사영의 부인인 정명련, 정약현 집 노비였던 김개동과 육손이, 마부 마노리, 아전 출신의 첩자 박차돌, 퇴물 상궁 길갈녀, 국밥집 주모 강사녀, 도망친 노비 아리 등의 이야기가 천주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일러두기에서 이 책은..

읽고본느낌 2020.02.23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SF 작가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안타깝다. 도서관에서 SF 분야의 책을 찾아보면 대부분이 외국 작가의 번역서다. SF는 과학과 인문학의 지식을 배경으로 우주적 상상력이 동반되어야 좋은 작품이 만들어진다. 우리에게도 멋진 SF 작가가 탄생할 정신적 토양은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은 김초엽 작가의 SF 단편 모음집이다. 작가는 1993년생이니 20대의 촉망 받는 젊은이다. 2017년에 '관내분실'로 한국과학문학상을 받았다. 책에는 여섯 편의 SF 단편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 제일 흥미를 끈 소설은 '관내분실'이다. 미래의 도서관은 죽은 자의 마음을 업로딩한 데이터를 보관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찾아가서 망자를 만나며 추모한다. '마인드'와 접속하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살..

읽고본느낌 2019.11.27

쇼코의 미소

최은영 작가의 중, 단편소설집이다. '쇼코의 미소'를 비롯해 7편이 실려 있다. '쇼코의 미소'는 작가의 등단작이면서 젊은작가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최 작가의 글은 몇 년 전 다른 소설집에서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라는 단편을 통해 만났다. 잔잔하면서 진한 감동에 젖게 하는 글이었다. 사회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안쓰러움이 작품 가득 묻어났다. 이 작품은 에도 수록되어 있어 두 번째로 읽었다. 좋은 글은 다시 읽어도 감동이 줄어들지 않는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가 그랬다. 인간관계에서 파문처럼 퍼져 나가는 감정과 느낌을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잔잔하게 잡아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작가의 문체는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다. 소설적 기교도 찾아볼 수 없다...

읽고본느낌 2019.08.16

82년생 김지영

재작년에 화제를 모은 책인데 이제야 읽어 본다.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로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현실이 어떠한지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픽션이지만 '82년생 김지영'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이다. 여성이 성장하며 겪는 고통과 심리 상태를 남성이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렵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아직 사회 곳곳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하대, 심하면 혐오의 감정이 남아 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태도 같은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폭력적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를 여성은 갖고 있는 것 같다. 은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식과 여론을 환기한 역할이 크다. 내 딸이 책의 주인공과 같은 82년생이다. 딸 둘만 뒀기에 페미니스트라고 할..

읽고본느낌 2019.08.04

나의 아름다운 이웃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고 싶어 찾은 책이다. 선생이 문단에 나온 초기에 쓴 짧은 소설 모음집으로, 시기로는 1970년대에 해당한다. 일상을 섬세하고 따스하게 그려내는 선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은 40대의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그래선지 세상을 보는 시선이 젊은 작가와는 다르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정겨운 얘기를 듣는 것 같다. 속 작품을 읽으면 70년대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다. 경제 성장과 부동산으로 부자가 생기기 시작하고, 아파트 문화가 시작될 때였다. 당시 사람들의 삶과 의식이 어떠했는지 잘 그려져 있다. 선생의 실제 경험이 작품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때 나는 20대였으니 마치 앨범의 옛 사진을 보는 듯, 이런 시절이었구나 하고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이런 콩트가 어쩌면 작가의 진면목을 제..

읽고본느낌 2019.07.29

고래

긴 겨울밤 시골 사랑방에서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밤새는 줄 모르고 사설에 빠져든다. 낯선 동네와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가 흥미진진하다. 줄거리를 예측할 수 없으니 긴장감도 높다.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이 그랬다. 는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2004년에 이 작품으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했다. 유명세는 알고 있었지만 늦게서야 직접 읽어봤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진 영욕과 성쇠' - 소설에 설명된 구절대로 다사다난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인생사를 그린 소설이다. 금복과 춘희를 중심으로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읽고본느낌 2019.04.07

탄실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의 전기소설이다. 김별아 작가가 고발하듯 펴냈다. 김명순의 어릴 때 이름이 탄실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 문화와 시대와의 불화로 지난한 삶을 한 여인이다. 1세대 여성 문인으로서 나혜석과 닮은 점이 많다. 문정희 시인이 쓴 '곡시(哭詩) -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에 그녀의 일생이 잘 그려져 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에서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

읽고본느낌 2019.03.27

레 미제라블(4)

4권의 부제는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다.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 그리고 1832년 6월 항쟁을 두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빅토르 위고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펼쳐 보인다. 세상을 보는 자신의 견해를 직접 밝히기도 한다. 당시 프랑스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이념 대결이 치열했다. 마치 지금 우리의 보수와 진보 갈등을 보는 것 같다. 가족 간에도 이념의 차이로 갈라진다. 마리우스와 마리우스 외할아버스 관계가 대표적이다. 공화파의 과격 계열은 혁명을 통해서 세상을 뒤엎으려고 한다. 위고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존재한다." 혼란한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계층은 빈민이다. 소설에서 위고가 제일 연민을 가지는 대상이다. 공평한 분배와 사회..

읽고본느낌 2019.02.28

레 미제라블(3)

1800년대 초반의 파리 묘사가 인상적이다. 한 편의 세밀화를 보는 것 같다. 당시에도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첨예했다. 지금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다. 보수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왕당파와 개혁을 꿈꾸는 자유주의파가 대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권의 주인공은 마리우스다. 마리우스는 사회 변혁을 바라는 청년 그룹을 통해 눈을 뜬다. 7, 80년대 우리나라에서 대학에 들어간 학생이 의식화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마리우스는 할아버지의 후원을 거절하고, 가난하지만 주체적인 삶을 찾아 나간다. 열정적인 활동 이전에 이런 내적 성숙 과정이 있어야 한다. 여기 등장하는 마리우스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고결한 청년으로 그려지고 있다. 장발장과 팡틴은 자베르의 추적을 피해 조용히 숨어 살고 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

읽고본느낌 2019.02.11

레 미제라블(2)

2권의 소제목은 '코제트'다. 밑바닥 삶을 살다 병으로 죽은 팡틴의 가련한 딸이다. 코제트는 엄마와 헤어져 탐욕스러운 테나르디에 부부 밑에서 학대받으며 살고 있었다. 두 번째로 탈주한 장발장이 코제트를 구출해 나온다. 추적하는 자베르 형사를 피해 수도원으로 도망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2권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워털루 전투와 봉쇄수도원을 묘사한 장면이다. 워털루 전투만 100페이지 가까이 서술되어 있다. 1815년 6월 18일의 워털루는 유럽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였지만 여러 우연이 겹쳤다. 나폴레옹이 승리할 수도 있었지만 위고는 그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한다. 나폴레옹은 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두 가지 결정적인 부분은 대포 소리를 못 들은 그루시와 오앵의 움푹 팬 길이다..

읽고본느낌 2019.01.27

레 미제라블(1)

민음사에서 나온 빅토르 위고의 완역본 다섯 권을 사서 1부를 읽었다. 올겨울에 전체를 읽어보려 한다. 총 페이지가 2,500쪽이나 된다. 장발장 이야기는 어릴 때 접하고, 소설도 축약본으로 읽은 적은 있으나 완역본은 처음이다. 전체를 읽어보겠다고 오래전부터 별렀던 책이다. 첫 권인 1부는 소제목이 '팡틴'이다. '레 미제라블'이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여기에 걸맞은 인물이 팡틴이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미혼모가 된 팡틴은 딸 코제트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한다. 공장에서 쫓겨나서는 몸 파는 여자로까지 전락한다. 장발장인 마들렌 시장의 도움으로 구출되지만, 결국은 딸을 만나지 못하고 병사하는 불쌍한 여인이다. 가난과 차별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영혼은 순수하고 고결했다. 혁명 이..

읽고본느낌 2019.01.05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보다 그의 삶이 더 흥미롭다. 처음 쓴 소설이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혜성처럼 문단에 등장한 뒤 돌연 시골로 잠적하여 은거에 들어간다. 오직 글쓰기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였다. 인간관계를 끊고, 최소한의 생활비로 버티면서 문학과 마주한다. 그리고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세상과 자신과 당당하게 싸워나간다. 그가 문학을 대하는 자세는 수도승 같다. 반항적이며 아나키스트 기질에 더해진 그의 독특한 생활 철학은 문단의 이단아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최근에 그의 책 두 권을 읽었다. 와 이다. 는 중편소설이고, 는 의기소침한 젊은이들에게 주는 에세이집이다. 전에 작가의 를 읽은 적이 있는데 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세상을 대하는 견해가 당돌하고 파격적이다. 인습과 고정관념을 무시하는 태도가 시..

읽고본느낌 2018.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