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일장을 치르면서 조문객들을 통해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아버지를 새롭게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아버지에 얽힌 사연이 가벼우면서 유머러스하게 그려져 있어 묵직한 주제인 이데올로기 문제가 깔려 있지만 부담 없이 읽힌다. 신안 여행을 할 때 책을 가져가서 이틀 저녁 동안에 다 읽었다.
정지아 작가의 전작인 <빨치산의 딸>이 부모의 구술을 받아 실제 일어난 사건을 정리한 것이라면, 이번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빨치산의 딸>이 결연한 비장미를 풍긴다면, 이 책은 경쾌한 댄스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미소와 함께 가슴 뭉클한 장면도 많다. 자신의 신조였던 사회주의와 평등사상을 삶으로 실천하신 아버지의 모습은 존경심이 든다. 이념은 자칫 관념으로만 머물기 쉬운데 평생의 삶으로 지켜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작가의 붓으로 아버지는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양 극단으로 갈라진 지금 우리 사회에 깨우치는 의미가 크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도구에 그쳐야 한다. 이를 금과옥조로 떠받들고 상대를 적대시할 때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졌는지 역사가 보여준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과격한 이데올로기의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복되어 가는 듯하다가 최근에 다시 악령이 살아나는 것 같다. 대중들의 이념 대립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세력이 더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소설에서 그려진 작가의 아버지가 보여준 삶은 감동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갈 곳 없는 방물장수 여인을 집으로 데려와 재워주고, 16살 일탈 소녀와 같이 담배를 나누며 아픔을 공감한다.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 받은 방물장수가 마늘을 훔쳐간 걸 알았을 때도 아버지는 화내거나 인간에 실망하지 않는다. "긍게 사람이재"라고 식구를 달래며 인간성을 포용한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작가는 이 말을 아버지의 십팔번으로 기억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회주의를 고수하며 평등한 세상을 꿈꾼 작가의 아버지는 조선일보를 읽는 사람과도 허물없이 어울린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반성되는 바가 있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아직도 멀리하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만나서 말을 섞기가 싫다. 그러나 아버지의 경우를 보면서 신념이나 사상이 인간보다 앞설 수는 없음을 확인한다. 또한 작가와 아버지와의 관계도 부러웠다. 대개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어떤 생각과 꿈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하거나 알고 있는 자식이 얼마나 있을까. 일찍 떠나가신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안쓰러운 심정에 젖는다.
빨치산 부모를 둔 작가는 - 뽈갱이의 딸로 - 특별한 경험을 하며 성장했다. 그런 고난과 부모에 대한 애증이 겹치면서 이런 작품이 탄생했을 것이다.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 위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한다. 더 이상 껍데기가 실질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짓거리는 멈췄으면 좋겠다. '해방'은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찾아와야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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