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자본주의의 적

샌. 2023. 6. 9. 10:32

정지아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2014년에서 2020년 사이에 발표한 작품 아홉 편이 실려 있다. 작가의 단편은 처음 읽어보는데 빨치산이었던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는 생소했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작가의 이미지가 워낙 강한 탓이리라. 장편소설인 <빨치산의 딸>과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떠나서는 작가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이번 단편에서도 '검은 방'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자본주의의 적' 등은 작가의 부모님과 연관된 자전적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친근하게 읽을 수 있었다. 반면에 다른 단편은 생경해서 전혀 다른 작가의 글을 읽는 듯했다. 

 

책의 표제작인 '자본주의의 적'은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은 한 자폐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먹으며 번성한다. 아예 소비와 과시 욕망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수양이나 노력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방현남이다. 같은 문예창작과를 다닐 때 둘이 나누는 대화가 나온다.

"너는 대체 뭣 하러 사니?"

"글쎄,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고..."

"너는 소설 안 써?"

"꼭 써야 돼?"

"그럼 문창과는 왜 왔는데?"

"그냥... 책이나 읽으면 될 것 같아서..."

 

현남은 비슷한 성향의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들 둘을 낳아 자폐가족을 구성했다. 작가의 염려와 달리 자폐가족은 나름의 방식으로 잘 살아간다. 좋은 물건을 볼 때 현남이 하는 말이 있다.

"좋네, 쩝쩝."

'쩝쩝'은 좋기는 한데 내 것은 아니라는 순간적인 포기가 내포된 현남식 말이다. 좋기는 하지만 그것을 소유하는데 드는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배가 고프지만 먹고 싶지는 않다, 좋지만 갖고 싶지는 않다, 이게 자폐가족의 생활패턴이다. 그러니 노동자의 월급으로도 자족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조금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 새 휴대전화를 갖기 위해, 더 큰 자동차를 굴리기 위해, 무한경쟁 속에 자신을 내던진다. 자본주의의 오랜 적이었던 사회주의는 새것을 갖기보다 낡은 것이라도 다 같이 나워 갖자는 주의였다. 그런데 자폐가족은 심상하게 묻는다.

"왜 가져야 돼?"

자폐가족은 자본주의의 동력 그 자체인 욕망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자폐가족은 욕망 그 자체가 부재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전원을 오프시킨다. 자본주의에 이보다 더 강력한 적은 없다. 작가가 이 가족의 삶을 그려보이는 건 자본주의의 물결에 관성적으로 휩쓸려 사는 우리의 삶을 반성해보자는 의도일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처럼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게 풀어내는 것이 정지아 작가의 매력이며 장점이다. 우리 사회의 모순과 문명의 위기 상황을 그런 작가의 필력으로 밝히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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