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제목만 보고 윤동주 시인이 직접적인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겐타로와 요코라는 제삼자를 통해 윤동주를 그린 소설이었다. 윤동주, 겐타로, 요코 셋은 두 세계 사이에 불안하게 서 있는 경계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겐타로는 10대가 되어서야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라진 친구를 찾아다니며 윤동주의 유고를 만나게 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요코라는 인물을 기록으로 마주하게 된다. 요코는 아이누인이었지만 일본인 가정에 입양되어 성장하다가 역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여자다. 윤동주가 동경에서 하숙을 할 때 요코는 하숙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윤동주를 가까이서 보았다. 요코의 추억을 톻해 윤동주가 어떤 인물인지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소설 <동주>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겐타로와 요코의 진술로 되어 있다. 세 사람 모두 두 세계의 사이에 놓인 존재로서 동질감을 가진다. 여기서 윤동주의 고향인 '간도(間島)'가 '사이'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사이'에 놓인 존재란 늘 불안하고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윤동주는 민족 저항 시인이 아닌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는 특정한 가치나 이념, 공동체에 치우치지 않는다. 조선어로 시를 쓴 것은 그것이 시인의 언어였기 때문이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다. 시인은 부끄러워하며 회의하고 반성한다. 요코가 기억하는 윤동주는 두려워하고 외로워하며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사람이었다.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빼앗기는 순간 이미 시인은 죽은 것이다.
겐타로와 요코는 자신들 존재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윤동주를 만난다. 둘은 한글과 아이누어를 새롭게 배우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시인의 애석한 생애에 공감을 하며 자각한 결과다. 어쩌면 하나의 세계에만 속한다면 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두 세계의 경계에서 번민하고 방황하는 가운데서 인간은 성장한다. 소설 속 셋은 태생적으로 그런 조건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의식적으로라도 하나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윤동주에게 정신적 스승 역할을 해 준 교진이라는 은자가 있었다. 윤동자가 체포되고 난 뒤 요코는 교진을 찾아간다. 조선의 말과 글이 특별히 우월하여 동주가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교진은 말한다. 그가 하는 말을 통해 윤동주의 의중도 짚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월하고 열등하고를 떠나,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고유한 자기라는 게 있기 마련이지. 동주가 조선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 더 좋고 나아서가 아니라 고유성을 지키려 했던 거고, 그것을 잃으면 실상 모든 것을 잃는다는 신념 때문이었을 게야. 들판의 모든 꽃이 사쿠라가 돼버리면 세상에는 꽃이란 것 자체가 없어지는 거란다. 사쿠라는 다른 꽃이 있어야 사쿠라인 게지. 일본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문명을 사칭하여 남의 나라를 강압적으로 침략하고 지배하고 있어. 망하는 길이지. 동주는 동주의 꽃을 피우려 했을 뿐이야. 시인이라면 백화가 만발한 꽃동산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니까. 꽃은 서로 다르되 향기의 숨결로 생명을 나누며 함께 숲을 이루지. 다르면서 서로 의지하고 교통하는 생존의 이치를 아는 시인이라면 남을 치거나 미워하지 않는단다. 다만 자기를 지키다 꽃처럼 고요히 죽어갈 뿐이지. 이런 시인은 어쩌면 험악한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험악한 세상도 이런 시인을 결코 바꾸진 못한단다. 앞으로 미친 세상은 마땅히 이래저래 바뀌겠지만 동주와 같은 시인은 시인으로 영원하다. 모두가 자기의 고유성을 죽음으로 지킬 때, 동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침략의 야욕은 필패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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