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인 프레데리크 그로가 쓴 걷기 예찬서다. 걷기가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자유, 느림, 고독, 침묵, 영원, 순례, 현존, 평안 등 책의 차례에 등장하는 용어만 봐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걷기의 대표 주자라고 할 만한 여러 인물들(니체, 랭보, 루소, 소로, 네르발, 칸트, 프루스트, 벤야민, 간디, 횔덜린)도 소개한다. 이들은 걸으면서 사유하고 자기 세계를 완성해 나간 사람들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걷기는 소요나 산책에 가깝다.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라는 별명이 붙은 루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걷기는 고독해야 하고, 고독하기 위해서는 혼자여야 한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만의 리듬을 지키기 위해서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도 네 명을 넘어서는 안 된다. 네 명을 넘어서면 집단이 된다. 인간 사회가 산으로 옮겨진 것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강조하는 철학하는 걷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걷기와 삶의 의미에 잘 어울리는 사람은 소로가 아닐까 싶다.
소개된 인물 중에서는 칸트가 제일 특이하다. 칸트는 규칙적인 엄격함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칸트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고향을 떠나본 적도 여행을 한 적도 없었다. 그의 일상은 오선지만큼이나 규칙적이었다. 그는 새벽 5시면 잠에서 깨어나 아침 대신 몇 잔의 차를 마셨다. 8시에 집을 나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1시까지 글을 썼다. 오후에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과학과 철학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이때 하루에 한 번만 한 식사를 했는데, 식탁에는 요리 세 가지와 치즈, 포도주가 있었다고 한다. 5시에는 집을 나와 공원 안으로 나 있는 정해진 길을 한 시간 정도 산책했다. 산책이 끝나면 밤 10시까지 책을 읽고 나서 자리에 누워 바로 잠이 들었다. 이 루틴에서 벗어나면 그는 불안해했다. 심지어는 강의를 듣는 학생의 상의에 단추가 떨어진 채로 있다가 어느 날 단추를 새로 달고 나왔는데, 칸트는 거기에 자꾸 신경이 쓰여서 새 단추를 떼어달라고 학생에게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칸트의 산책은 그만의 사색임과 동시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칸트는 허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여든 살까지 살았는데, 칸트는 자신이 오래 사는 것이 엄격하고 절도 있는 생활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는 평생 동안 단 하루도 정해진 코스를 걷는 규칙적인 산책을 거르지 않았다. 딱 두 번만 길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한 번은 루소의 <에밀>을 일찍 손에 넣기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운 정보를 얻으러 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규칙과 원칙이라면 칸트에 대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산책에서는 걷는 즐거움이나 일상에서 벗어난 자유, 자연과의 신비로운 합일 같은 느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어쩌면 현대인의 하루 만 보 걷기 같은 의무감과 닮았는지 모른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을 읽으면서 나만의 걷기가 있는지를 자문해 보게 된다. 책에 소개된 인물들은 각자의 다양한 걷기를 통해 자기 완성의 길을 걸어갔다. 전원을 걸으며 치유를 받고, 도시를 걸으며 세상과 만나고, 고통을 잊기 위해 걷고, 끝없는 방랑의 길을 걷기도 했다. 이유나 방법은 달라도 공통되는 점은 있다. 깊게 사유하며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걷기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책에서 눈에 띄는 문장들을 추려 보았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걸을 때 누릴 수 있는 자유다. 걸어가는 몸은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냥 태곳적에 시작된 생명의 흐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두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짐승, 키 큰 나무들 사이의 순수한 힘, 한 번의 외침에 불과한 것이다.
오랫동안 걷다 보면 포기의 자유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걷다 보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지,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지를 더 이상 알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꼭 필요한 것들의 무게가 양어깨에 느껴지면,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 며칠이라도, 몇백 년이라도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다.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지금은 어떠한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이름과 나이, 직업, 경력 등 우리가 지옥에서 살았다는 걸 보여주는 오래된 특징들을 떠올리는 순간 바로 모든 것이 다 가소롭고 사소하고 덧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걸을 때는 그 어느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언덕들은 거의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천천히 다가오고, 풍경 역시 아주 조금씩 변화할 뿐이다. 우리는 기차나 자동차 안에서 풍경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다. 빠르고 생기 넘치는 눈은 모든 걸 다 이해했고 하나도 빠짐없이 포착했다고 믿는다. 걷는 동안에는 사실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가 우리 몸속에 천천히 자리잡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다가가는 것이라기보다는 거기 있는 것들이 우리 몸속에서 더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는 늘 침묵 속에서 걷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쿵쿵대는 발걸음 소리와 알아듣기 힘든 외침과 목소리, 중얼거림, 날카로운 엔진 소리 등 속도와 충격이 지배하는 길거리와 도로, 공공장소를 떠나자마자 우리가 가장 먼저 되찾는 것이 투명한 침묵이다. 모든 것이 다 조용하고 주의 깊다. 모든 것이 휴식을 취한다. 사람들의 수다와 소문, 풍문과는 이제 작별한다. 이제는 걷는다. 걷다 보면 꼭 귀가 숨을 들이마시는 것처럼 침묵이 엄습한다. 걷는 사람은 마치 차가운 바람이 거칠게 불어 구름을 내쫓듯 침묵을 받아들인다.
걸을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걷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걷기만 하면 순수한 존재감을 되찾을 수 있고, 어린 시절을 만들어낸 삶의 소박한 즐거움도 재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걷기는 부담을 덜어주고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도록 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그 영원성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걷기가 어린아이의 놀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날의 날씨와 태양의 광채, 나무의 크기, 푸른 하늘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 걷기다. 경험이나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너무 많이 걷거나 너무 멀리까지 걷는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봐버려서 비교밖에 하지 않는다. 영원한 아이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비교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걸어야 한다. 혼자 떠나야 한다. 산을 오르고 숲을 지나가야 한다. 사람은 없다. 오직 언덕과 짙푸른 나뭇잎만 있을 뿐이다. 걷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어떤 역할을 할 필요도 없고, 어떤 지위에 있지도 않으며, 어떤 인물조차 아니다. 걷는 사람은 단지 길 위에 널려 있는 조약돌의 뾰족한 끝 부분과 키 큰 풀의 가벼운 스침, 바람의 서늘함을 느끼는 몸뚱이일 뿐이다. 걷는 동안 세계는 더 이상 현재도, 미래도 갖지 않는다. 걸으면서 7월의 어느 저녁의 빛에 잠긴 바위가 띠는 푸른색, 정오의 올리브나무 잎사귀가 발하는 은빛 섞인 초록색, 아침의 보랏빛 언덕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은 과거도, 계획도, 경험도 없다. 그의 마음속에는 영원한 아이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끝없이 걸으라. 아주 오랫동안 높은 산을 오를 때는 산의 높은 곳을 피부의 모공으로 통과시키고, 야산을 오래 걸어 내려갈 때는 그것의 형태를 몇 시간 동안 들이마시라. 몸은 그것이 밟고 지나가는 흙으로 빚어진다. 그는 더 이상 풍경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곧 풍경인 것이다.
'걷기 위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무리 자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걷기의 참뜻은 이타성(異他性, 다른 세계, 다른 얼굴, 다른 문화, 다른 문명)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화된 세계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 그것은 바깥쪽에 있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 바깥쪽에, 고속도로 바깥쪽에, 이익과 빈곤의 생산자들 바깥쪽에, 그리고 겨울 해의 부드럽고 연한 빛과 봄에 부는 미풍의 상쾌함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나은 할 일이 항상 있는 사람들 바깥쪽에 있는 것이다.
산책의 즐거움은 봄철의 태양이 부르면 자기 자신에게 약간의 자유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하던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그만두는 사람에게만 자연적으로 제공될 것이다. 잠시나마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 자신의 운명이 제멋대로 굴러가도록 내버려둔 채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해야 한다. 산책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이득을 얻어내겠다는 기대를 갖지 말고, 관심사와 근심거리를 전부 다 뒤에 남겨두어야만, 산책은 삶의 경쾌함과 영혼의 온화함을 다시 발견하는 그 무상적(無償的)이며 미적(美的)인 순간이 될 것이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산책하고, 불확실하고 주저하는 걸음으로 걸어 다니다, 드디어 눈을 든 채 천천히 그냥 자기 동네를 누비는 이 전례 없고 손쉬운 호사를 누려야 할 것이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달리지 않고 어떤 명확한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않고 그냥 걷기만 하는데도, 도시가 그 도시를 처음으로 보는 사람에게 주는 느낌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특별히 그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므로, 색깔과 세부, 형태, 외관 등 모든 것이 풍부하게 주어진다. 목적 없이 홀로 걷는 산책은 시각을 다시 발견하도록 해 준다. 즉, 나는 덧문이 띠는 색깔을 보고, 벽에 어떤 색깔의 얼룩을 만들어놓는지를 보고, 길고 검은 격자창의 섬세한 아라베스크 무늬를 보고, 돌로 만든 기린처럼 길쭉한 집들과 뚱뚱한 거북이처럼 크면서도 납작한 집들의 기묘한 형태를 보고, 진열창들의 구성을 보고, 해 뜰 무렵에 걸을 때는 푸른색과 회색이 섞인 건물 정면과 주황색 창문들을 본다.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길거리들을 돌아다닌다.
걷기는 우리의 유한성(거친 욕구로 인해 무거워진 육체, 땅에 못 박히듯 고정된 육체)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걷는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고양시키거나 중력을 속이거나 속도나 고양에 의해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자신의 조건에 환상을 품는 것이 아니라, 지면의 단단함과 육체의 허약함을 깨닫고 땅에 발을 내딛는 느린 동작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조건을 실현하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 그것은 곧 모든 것을 체념한 뒤 몸을 숙이고 걷는 바로 그 육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같은 더딘 체념과 엄청난 피곤함이 우리에게 존재의 즐거움을 안겨준다는 사실이다. 천근만근 무거운 우리의 육체는 마치 뿌리를 내리려는 것처럼 땅에 떨어진다. 걷는다는 것은 곧 서서 죽으라는 권유다.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모든 게 파괴되고 문명도 사라져버리면 연기가 솟아오르는 인류의 폐허 위에서 할 일이라고는 걷는 것밖에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