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학번 최영미 작가의 자전소설이다. 고3 입시 전쟁부터 서울대 입학, 운동권 활동, 사랑, 결혼, 이혼의 아픔, 그리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자유발랄한 영혼이 시대의 고뇌에 동참하고 방황하면서 자신의 꿈을 좇아 나가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생생하다. 책에 빠져 단번에 읽었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 내 청춘이 떠오른다. 시대는 달라도 누구나 비슷했을 것이다. 고민의 방향은 개인마다 달랐겠지만 시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젊음은 없었다. 그중에 일부는 운동에 뛰어들고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청동정원>은 80년대 운동권의 모습을 사실대로 보여준다. 한 시대의 기록화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초 상황도 비슷했다. 박정희의 유신 통치가 시작되고 얼음왕국이 되었다. 학교에는 군대가 진주하고 문 닫는 날이 더 많았다. 일부 강경파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다 외면하고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 공부만 하든가, 아니면 열심히 노는 쪽이었다. 나는 어땠는가?
어둠이 짙을수록 별이 빛나듯, 암담한 시대일수록 분투하는 청춘은 더 아름답다. 순수와 열정이 없다면 청춘이 아니다. 그러나 빛에도 그늘이 있다. 너무 독재 타도만 외치다 보니 세상을 보는 균형된 시각을 잃었다. 독선적이 될 수밖에 없다. 평등과 공동선을 위해 투쟁했던 당시의 운동권도 여전히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작가는 명망 있는 운동권 선배와 연애하고 결혼하지만 남편의 의식은 가부장적인 시대에 갇혀 있다. 머리만 유토피아를 그릴 뿐 실생활에서는 실천하지 못하는 이율배반의 삶이다. 이런 인간의 이중성은 지금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결혼 생활과 이혼 이야기가 제일 마음에 아팠다.
세상은 변한다. 과거에 금과옥조로 떠받들던 이념은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저물어갔다. 당시에 열성적인 운동권 중 일부는 제도 정치권으로 흡수되고 그들이 혐오했던 정당 소속이기도 하다. 일부는 돈벌이에 열심이다. 이제 사상 싸움의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80학번 운동권이었던 사람이 미국 대사를 칼로 찌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의 가는 길은 정말 다양하다.
소설 말미에 작가의 이런 고백이 나온다. 인생의 성공 실패에 관계없이 이것이 그 시대가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80년대가 내게 남긴 것은 이념이 아니라 '정서'이다. 이념이나 사상은 변할 수 있지만,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 옷을 고르는 취향, 타인을 대하는 태도, 말버릇이나 헤어스타일은 한번 굳어지면 평생을 간다.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 정의에 대한 갈증, 돈과 악수하지 않는 손, 권력에 굽실거리지 않는 허리를 그 시절은 내게 물려주었다."
이런 자전소설을 읽는다는 건 남의 과거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호기심만은 아니다. 지금 이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게 된다. 시대 배경은 달라도 사람살이의 모습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추구와 함께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의 화두가 있다. 행동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외면하지는 말아야겠다. 뒷날 그때 넌 어떻게 행동하고 살았느냐고 물었을 때 부끄럽지 않은 대답을 하려면 자신과 시대를 성찰하면서 더 치열해져야 할 것이다. 과거 내 젊음이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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