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한 글자

샌. 2015. 3. 10. 12:03

먼 옛날, 사람들이 처음 말이란 걸 하기 시작했을 때 사물의 이름은 단음절이 많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 마디로 된 말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그 한 글자로 된 말에 주목했다.

 

<한 글자>는 카피라이터 정철 씨가 쓴 단상집이다. 카피라이터답게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사물의 핵심을 꿰뚫는 혜안이 곳곳에 보인다. 짧은 글이지만 쉽게 읽히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삶의 경구로 삼을 만한 내용이 많다.

 

책을 보면서 나는 건성으로 세상을 살고 있구나 싶어 자책한다.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찰과 애정이 얼마나 깊으면 이런 생각이 떠오를 수 있을까. 지은이가 말한 대로 "세상은 넓고, 나는 한없이 좁다."

 

책에 나오는 262개 글자 중에서 마음 끌리는 대로 몇 개를 골라 보았다.

 

 

내가 외롭지 않다고 착각하는 건 내 뒷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산의 매력, 정상이 있어 도전 의욕을 갖게 한다.

바다의 매력, 정상이 없어 욕심을 내려놓게 한다.

당신의 매력, 때론 산을 때론 바다를 찾을 줄 안다.

 

꽃은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봄에게 배울 점. 그것은 햇볕을 초대하는 능력도 아니고, 시냇물을 다시 흐르게 하는 능력도 아니고, 새싹을 틔우는 능력도 아니고, 개구리를 튀어오르게 하는 능력도 아니다.

봄에게 배울 점은 딱 하나. 뛰어난 위치 선정이다. 겨울 다음이라는 위치 선정이다. 추운 겨울이 없었다면 봄은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평범한 계절이었을 것이다. 내 능력을 키우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내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 곳에 나를 데리고 가는 일이다.

 

인생 시험, 어려운가?

정답은 늘 만족이다. 문제는 늘 당신이다.

 

백발에 허옇게 수염을 기른 신이 나를 찾아와, 스무 살로 돌아가게 해 준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맙다고 깍듯이 인사한 후에 거절해야겠지. 살아 본 나이를 또 사는 건 재미가 덜할 테니까. 스무 살은 알 수 없는 소중한 가치가 지금 내 나이에도 있을 테니까.

인생은 한 순간 한 순간 끝까지 소중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신의 모습이 스무 살이 아닌 이유를 눈치채야지.

 

섬이 외로워 보이는 건 하루 종일 육지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육지만 바라보느라 자신의 품에서도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물이 흐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큰방이 큰방인 것은 곁에 작은방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방이 사라지는 순간 큰방은 단칸방이 된다.

 

거미줄에 걸려 말라 죽은 나비에게 꿈을 물어보면 대답이 없다.

꿈꾸지 않는다. 죽었다.

같은 뜻.

 

1

남을 이기면 일등이 되고, 나를 이기면 일류가 된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노를 저어야 한다. 노를 들고 바다 위에 수없이 NO라고 써야 한다.

당연과 상식을 거부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겨울 하루살이에게 인생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춥다."

여름 하루살이에게 인생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덥다."

하지만 사계절을 다 살아 본 우리는 늘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다. "인생, 잘 모르겠다."

생각은 왜 그렇게 많은지, 확신을 왜 그렇게 없는지.

당신도 나도 잠깐 퍼덕거리다 가는 하루살이인데.

 

숲을 보려면 숲을 보지 마세요.

숲을 보지 말고 나무 하나하나를 보세요. 나무 하나하나의 사연을 더한 것이 숲입니다.

사람들을 알고 싶으면 사람들을 만나지 마세요.

사람들을 만나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세요.

 

아빠를 아버지라고 부를 때부터 철이 드는 게 아니다.

아버지를 다시 아빠라고 부르고 싶은 순간부터 철이 든다.

 

나이가 들면 귀가 어두워진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부지런히 남의 말을 들으라는 뜻이다.

뒤늦게 보청기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그땐 아무리 귀한 말을 들어도 그것을 인생에 적용할 시간이 부족하다.

 

별을 보려면 하늘을 보지 마세요. 땅을 보세요. 당신의 발끝 1cm 앞을 보세요. 그래요. 그곳이 별이에요. 당신도 별에 살지요. 너무 가까워 잘 보이지 않는 지구라는 아름다운 별에 살지요. 우리의 눈은 지독한 원시. 가까이에 있는 아름다움은 오히려 잘 보지 못하지요. 가까이에 있는 사람도, 가까이에 있는 행복도.

 

왼손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오른손을 만나는 일이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라고, 친구의 성공에 박수를 보내라고, 신은 우리에게 두 개의 손을 주었다.

 

위로의 시간. 용서의 시간. 치료의 시간.

진정한 치료는 가려 주고 덮어 주는 것. 어둠을 내려 세상이 상처를 볼 수 없게 하는 것.

상처에 수술용 칼을 대는 게 아니라 상처가 스스로 아물 때를 조용히 기다려 주는 것.

 

가리지 않고 내 알몸을 보여 주는 사람.

숨기지 않고 내 허물을 보여 주는 사람.

감추지 않고 내 눈물을 보여 주는 사람.

벗어야 벗이다.

 

내 곁에 당신, 인생은 이 다섯 글자면 충분.

아니, 내곁에당신, 띄어쓰기도 없애버리고 싶어.

 

드라마를 보는 남녀.

1편을 재미있게 본 남자는 여자와 함께 2편을 보고 싶어 하지만, 1편을 재미있게 본 여자는 남자와 함께 1편을 다시 보고 싶어 한다.

남자는 진도, 여자는 농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누구보다 열렬한 애독자 한 사람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어떤 시를 쓰든 그의 독자는 감동할 자세가 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시.

제목: 사랑

사랑해.

이 시를 받아든 독자는 시의 함축성, 명징성, 확장성에 감탄한다. 다른 어떤 수식어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짧은 한 줄에 삶과 죽음과 우주가 다 담겨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내 시를 읽어 줄 단 한 사람의 독자를 만나는 일이다. 가장 평범한 내 이야기를 가장 특별하게 들어 주는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결혼은 격이 맞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라, 결이 같은 사람과 하는 것이다.

격혼이 아니라 결혼이다.

 

눈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엔 두 가지 생각.

눈물을 흘리는 눈일까, 눈사람 만드는 눈일까.

하지만 누군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지.

새싹이 돋는 눈. 저울에 새긴 눈. 그물의 구멍 눈.

세상은 넓고, 당신은 좁고.

 

내 술잔을 채울수록 우리의 술병은 비어간다.

 

당신이 입주할 마지막 집은 원룸이다.

욕실 없는, 욕심 없는.

 

글을 쓴다는 건, 바다를 '파도 공장'이나 '깊이 더하기 넓이'라고 멋을 부려 표현하는 게 아니라,

바다를 바다라고 말하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볕이 잘 드는 양지를 찾아다니는 사람은 자신의 묏자리를 찾아다니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쌀을 준 농부에게 드리는 최고의 보답은, 식탁에 앉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게 아니라 밥그릇 바닥이 보일 때까지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이다.

 

한밤중, 가로등도 없는 한적한 지방 도로. 우리는 불빛 하나가 달려오면 오토바이, 두 개가 달려오면 자동차라고 믿는다. 고정관념이다. 불빛 하나는 헤드라이트가 고장 난 자동차일 수도 있다. 불빛 두 개는 나란히 달려오는 오토바이 두 대일 수도 있다.

지식이라는 빛, 경험이라는 빛이 고정관념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낳기도 한다.

 

물고기는 짖지도 노래하지도 않는다. 당신도 물고기에게 짖어라 노래하라 하지 않는다.

평화란 남에게 나를 강요하지 않는 것.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

정말일까? 참고 기다리면 음지가 양지 될까? 세상을 양지와 음지로 나누고, 자신에게 굴복하면 볕 한 줌 더 주겠다고 압박하는 해라는 놈을 끄집어 내려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음지에 쭈그리고 앉은 이유가 내 무능이나 게으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굴복해! 복종해! 감사해! 늘 이렇게 명령하며 자신이 맨 위에 서는 하나의 질서만을 강요하는 해일 수도 있다는 사실.

명심해!

 

당신과 피를 나눈 인연들. 부모, 형제, 자식, 모기.

모기는 아주 짧은 순간 당신을 스쳐 가지만 당신의 살갗에 빨간 흔적을 남긴다. 인연은 흔적이다. 모든 인연은 당신의 인생이 그렇게 따분하지는 않았다고 증언해 주는 소중한 흔적이다. 그것이 아픈 상처를 남기고 떠난 악연일지라도. 당신과 피를 나눈 모기에게도, 부디 에프킬라 잘 피해 천수를 다하라고 빌어 주시기를.

 

아이디어가 자꾸 설익은 생각에서 멈춘가 싶으면 너무 조급하게 아이디어를 꺼내려 하지 마세요. 머릿속에 그냥 방치하세요. 아직 뜸이 덜 든 것이니까요.

생각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도 생각을 합니다. 생각에게 스스로 발효할 시간을 줘야 아이디어가 익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할 일은 초조가 아니라 방치입니다.

방치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설익은 생각이 뜸이 잘 든 기특한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그때 그것을 꺼내어 내 아이디어인 척 사람들 앞에 내놓으면 됩니다.

 

밥이나 먹어. 돈이나 벌어. 책이나 읽어. 꽃이나 심어.

나가 나타나면 밥도 돈도 책도 꽃도 다 하찮은 게 되어 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글자, 나.

 

나는 얼마짜리인가?

지금 내 주위를 둘러싼 사람의 수, 그들이 내게 보내는 환호와 박수의 크기가 나의 값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졌을 때 사람들이 흘릴 눈물의 양, 그것이 나의 값이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눈물의 양이다.

 

물 샐 틈 없다는 건 물이 들어올 틈도 없다는 뜻.

고인다는 뜻, 썩는다는 뜻.

틈나는 대로 빈틈을 보일 것.

 

우리 모두는 가끔 탈을 쓰고 일을 한다.

작은 일에 까탈, 혼자 슬쩍 이탈, 남의 것을 강탈, 너무 먹어 배탈, 남는 것은 허탈.

이것들이 내 얼굴로 굳어져 벗을 수도 없게 되면 정말 탈이다.

 

나무의 옷.

나무는 추운 겨울에 옷을 벗는다. 옷을 벗어 땅을 덮어 준다. 땅속엔 그의 뿌리가 살고 있다.

나는 내 뿌리를 덮어 준 적이 없다.

내 옷을 벗어 엄마를 덮어 준 적이 없다.

 

담 너머에는 더 좋은 것이 있겠지. 그러니 바람도 담을 넘고 달빛도 담을 넘고 도둑도 담을 넘는 것이지. 나도 그들을 따라 담을 넘고 싶었지. 하지만 두 팔을 뻗어 담을 타고 넘으려면 지금 내 손에 들고 있는 꽤 좋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지.

나는 담 넘기를 포기했지. 더 좋은 것을 포기하고 꽤 좋은 것에 만족하기로 했지. 물론 후회는 없지. 담 너머엔 내가 들고 있는 꽤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이라 믿고,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담을 넘으려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너는 수평, 나는 수직.

너와 내가 만나 모음 오를 만든다.

오! 내가 땅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나올 만한 축복이다.

주저앉지 말아야지.

 

홀로 먹는 밥은 진수성찬일수록 외롭다.

 

당신은 지금 엄마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꼬박 열 달을 웅크리고 있다.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을 잘 참아 내고 있다. 이제 끝나 간다. 당신은 이미 웃기 시작했고 엄마 아빠의 손길도 느낄 수 있다. 이때를 기억하는가?

기억나지 않아도 좋다. 어쨌든 당신은 그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을 잘 견디고 세상에 나왔다. 오늘이 지루한가? 내일이 답답한가?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참는 건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이 한 일이다. 또 하면 된다. 하겠는가?

 

흙을 밟고 살아야 한다.

삶이 끝나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때 흙이 내게 손을 내밀며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하면 죽을 만큼 외로울 테니까. 하지만 이미 죽어 버려 더 죽을 수도 없을 테니까.

 

불을 붙이지 않은 초가 백 년을 산다 해도 그런 산 게 아니다. 그의 나이는 여전히 0살이다. 초는 머리에 불을 붙여 촛불이 되는 순간부터 나이를 먹는다. 그것이 진짜 나이, 유효 수명이다.

사람도 인생에 뜨겁게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유효 수명이 시작된다. 스물이고 서른인 척하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사랑에, 사람에, 일에 한 번도 불을 붙여 본 적 없는, 나이 0살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뇌 한가운데 새겨 둘 한마디.

욕심내야 할 것은 성공이 아니라 성장이다.

 

둑을 쌓는 데 1년, 둑이 무너지는 데 1분.

1분 만에 1년이 날아갔지만, 어떻게 쌓아야 무너지지 않는지 배웠다.

그럼 됐다.

 

몸은 마음을 모시고 산다. 평생 껴안고 산다. 그러니까 마음이 흔들리는 건 마음을 껴안고 있는 몸이 먼저 흔들렸다는 얘기다. 한없이 게을러지거나 갑자기 짜증이 나거나 쉽게 싫증이 나거나 괜히 우울해진다면, 마음을 야단칠 게 아니라 몸을 먼저 추슬러야 한다.

 

간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술 조심, 담배 조심, 과로 조심, 스트레스 조심. 이렇게 조심조심 사는 건 간을 무시하는 짓이다. 간은 이 모든 부담을 견디라고 있는 것이다. 너무 과한 조심과 보호는 실력을 발휘할 기회, 능력을 끌어낼 기회를 빼앗는다.

 

하세요, 라는 뜻의 충청도 사투리.

혀를 사용할 땐 충청도 양반처럼 느리게 혀. 정말 이 말을 내뱉어도 되는지 한 번 더 생각혀.

 

풀은 안다. 바람은 지나간다는 것을.

그래, 괜찮다. 잠시 휘청거려도 괜찮다. 뿌리만 흔들리지 않으면 다 괜찮다.

풀은 안다. 비는 멎는다는 것을.

그래, 괜찮다. 비와 눈물이 뒤섞여도 괜찮다. 뿌리만 떠내려가지 않으면 다 괜찮다.

너도 안다. 아픔은 지나간다는 것을. 슬픔은 멎는다는 것을.

 

지붕의 역할은 비를 막아주는 게 아니라 빗소리를 다르게 들려주는 것.

집의 역할은 잠을 재워 주는 게 아니라 누워 꿈꿀 수 있게 해 주는 것.

 

진주를 품을 조개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다.

 

시선이 땅을 향하고 있으면 날개가 있어도 날아오르지 못한다.

길은 바라보는 쪽으로 열린다.

 

문은 잠겨 있고 당신의 손엔 열쇠도 없다.

절망인가, 희망이다.

그래도 문이 있다는 것.

 

사람들의 키가 다 같았다면 나는 앞에 서고 너는 뒤에 서는 단체 사진이라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

무시해도 좋은 인생은 없다.

 

우리는 강물의 추락을 추락이라 하지 않는다. 폭포라는 힘찬 이름을 붙이고 황홀한 표정으로 그 장엄한 추락을 감상한다.

왜 그럴까?

추락하자마자 몸을 추스리고 다시 바다를 향해 움직일 거라 믿기 때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잊지 않는다면 한두 번의 추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하지만 당신은 새가 아니다. 벌레를 먹지 못한다. 너무 부지런히, 너무 열심히 살면 아침마다 벌레를 잔뜩 들고 이걸 어떻게 처치해야 하나, 고민만 쌓인다. 그러다 기어코 벌레를 먹는 최초의 인간이 되어 동물원에 갇힐 수도 있다. 무조건 부지런히, 무조건 열심히는 내 인생을 엉뚱한 방향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화를 내면 건강에 해롭다고 한다.

화를 참으면 속병이 된다고 한다.

어쩌라는 걸까.

그래, 웃으라는 거겠지. 어이없어 웃는 웃음도 웃음이니까.

화 대신 하, 하하하 웃으며 화를 덮는다.

 

꼭 마셔야 하는 자리. 꼭 읽어야 할 책. 꼭 만나야 하는 사람.

없다. 없다. 없다.

꼭이라는 말 하나만 치우면 경직과 부담이 사라져 인생이 훨씬 여유롭고 헐렁해진다.

꼭이라는 말에 끌려다니는 꼭두각시는 되지 말라는 얘기.

꼭 기억하지 말고 웬만하면 기억해 두시길.

 

어는 척하다 들통 나서 온 동네 창피 사는 법.

위로하고 충고한다면 지적질하다 사람을 잃는 법.

핵심을 강조하려다 오히려 핵심을 놓치는 법.

간단하다. 말을 많이 한다.

 

하늘은 마른 땅을 촉촉이 젖게 해 주려고 비를 내려보낸다. 출발 직전 한 방울 한 방울에게 도착할 지점을 알려 준다. 온 땅이 고루 젖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율한 후에 낙하시킨다. 그러나 목표한 곳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없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바람이 데려다주는 낯선 곳에 떨어진다.

그래서 땅에 큰 혼란이 일어나는가? 아니다. 괜찮다. 목표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 없어도 땅은 고루 젖게 되어 있다. 바람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한 지점을 정해 놓고 그곳에 닿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아등바등 살 필요는 없다. 온몸을 바람에 맡기고 사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다.

 

지금 하는 일, 많이 힘드세요? 그렇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편입니다.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위 사람은 평소 품행이 방정하고 근면 성실하며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여 타의 모범이 되므로 이 상장을 수여함.

우리 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이런 상장 받고도 얼굴 빨개지지 않을 타의 모범이 정말 있을까. 이제 상장에서 품행, 방정, 근면, 성실, 솔선수범 같은 무거운 한자어 훌훌 털어 버리고 어깨 툭 치듯 이렇게 가볍게 쓰면 안 될까.

너, 멋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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